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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감의 기술 Nov 27. 2020

부러움에 지기 전에

 어릴 적 장난감 가게 진열대에 위풍당당하게 서있는 마징가 Z가 너무 갖고 싶었습니다. TV에서 일주일에 한 번 보는 게 전부였던 나에게 마징가 Z는 영웅이었습니다. 마징가 Z를 항상 가지고 노는 녀석이 부러웠습니다.

 초등학교, 공 하나로 수십 명이 몰려다니며 놀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운동장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삐까 번쩍한 삼천리 자전거가 나타났습니다. 환한 웃음을 머금고 자전거를 뽐내던 녀석이 참 부러웠습니다. 한 번이라도 얻어 타볼까 옆에서 기웃거려봅니다. 손이라도 갖다 대면 기겁하던 녀석 표정이 떠오릅니다.

 지금은 상상하지 못하는 단어인 콩나물 교실, 그 교실에서 야간 자율학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매일 밤마다 자리를 지켜야만 했고요. 공부한다고 앉았지만 집중 안 되고 딴생각을 하는 날이 많았죠. 한 녀석이 한쪽 이어폰만 티셔츠 안으로 넣어 올린 뒤 귓바퀴를 감싸 한쪽 귀로 라디오를 듣고 있었습니다. 워크맨이라 불렸던 손바닥만 한 기계였는데 보는 순간 갖고 싶었습니다. 나도 한번 들으면 안 되냐고 하니 당연히 거절을 합니다. 하긴 듣다가 선생님한테 걸리면 그 또한 난감할 노릇입니다. 워크맨을 들으며 흥얼거리던 녀석이 부러웠습니다.

 콩나물 교실을 벗어나 대학을 갔습니다. 학교 가는 길은 늘 만원 버스에 시달렸습니다. 정문에서 내려 터벅터벅 걸어갔습니다. 정문에서 강의실까지는 왜 그리 먼지. 순간 부릉부릉 요란한 소리를 내는 오토바이 한 대가 내 앞을 쏜살같이 지나쳐갑니다. 'HONDA' 글자가 선명했습니다. 헬멧을 들고 강의실에 들어온 그 녀석이 부러웠습니다. 젊음의 상징처럼 여겼던 오토바이. 나도 오토바이 한 대 있었으면.

 얼마 뒤 오토바이를 제치고 강의실 앞에 떡하니 주차된 자동차가 있었습니다. '엘란트라' 그 당시만 해도 자동차가 보급되기 전이었습니다. 웬만한 가정에도 자동차가 없었던 시절이니 평범한 학생은 꿈도 꾸지 못했죠. 여자 친구를 태우고 유유히 사라지는 그 녀석이 진짜 부러웠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하나둘씩 결혼을 합니다. 친한 친구가 결혼했습니다. 신혼집이 좋아 보입니다. 부모가 아파트를 마련해줬다며 당연하게 말합니다. 대출을 알아보고 있던 나로서는 녀석이 부럽기만 했습니다.

인생은 부러움의 연속인가 싶습니다. 부러우면 지는 거라고 하던데 난 늘 지고만 산 걸까요?  


 그렇게 갖고 싶어 했던 마징가 Z를 우리나라의 태권 V가 나타나 한 방에 물리쳤습니다.

 내 앞에서 마음껏 자랑하던 녀석이 자전거를 타고 신나게 지나갔습니다. 세상 다 가진 표정을 지으면서요. 얼마 후 핸들을 잘못 돌렸는지 길바닥에 ‘꽈당’하고 넘어졌네요. 무릎이 까이고 엉엉 우는 녀석을 보며 쌤통이다 싶었습니다.

 친구가 모는 젊음의 상징 오토바이 그 뒷자리에 앉았습니다. 바람을 시원하게 가르며 도로를 질주하는 상쾌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토바이 사고는 사망이 기본이요, 하늘이 보호하면 중상이라는 말에 내 기억에서 지웠습니다.

 캠버스를 누비며 엘란트라가 지나갔습니다. 곧이어 마이카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 생활을 하며 내 인생의 첫차를 구입했습니다. 이전의 부러움은 어디로 갔는지 기억이 없습니다.

 이 은행, 저 은행 대출을 받으려 뛰어다니던 때가 있었습니다. 능력 없는 부모를 원망하며 투덜 댄 적도 있었고요. 내 집 마련한 후에는 그 부러움은 사라졌습니다. 대신 다른 욕심을 불러옵니다. 좀 더 큰 집, 좀 더 많은 벌이 같은 것들.

 그때는 참 많이도 부러워했습니다. 간혹 부러움이 지나쳐 시기와 질투가 생깁니다. 살아보니 그 숱한 부러움은 세월이 흐르면서 저절로 잊혀져 갔습니다. 그렇게 잊힐 것을 왜 그렇게 부러워하며 배 아파했을까요? 괜한 사람한테 짜증까지 내면서 말이에요.   




 부러움을 잊으면 또 다른 부러움이 생깁니다. 가진 것에 만족하라고 배웠는데 말처럼 쉽지 않네요.

 지금은 누구를, 어떤 것을 부러워하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나보다 많이 가진 사람들, 나보다 잘 나가는 사람들을 보면 아직도 부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돈 잘 버는 친구를 봐도 부럽습니다. 그러려니 하며 받아들이고 살아가지만 부러워하는 마음은 쉽게 없어질 것 같지 않습니다.

 이쁜 여자와 데이트하는 젊은 녀석도 부럽습니다. 이쁜 여자가, 데이트하는 모습이 부럽지만 그보다는 젊음이 더 부럽습니다. 어떤 때는 많이 부럽습니다. 시간을 되돌려 청춘을 돌려받고 싶다는 마음까지 들기도 하고요.

 아는 집 자녀가 똑 부러지게 잘한다는 말을 들어도 부럽습니다. 친구 자녀가 잘 나가면 축하를 해주지만 집으로 돌아와 내 아이를 닦달하곤 합니다. 제대로 야무지게, 똑바로 정신 차려서 좀 잘해라고 하면서요.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가 남편을 존경하는 부부를 보면 부럽습니다. 아무런 걱정이 없어 보이는 부부를 봐도 역시 부럽습니다. 오랜 시간 살을 맞대고 살았는데 그 감정이 아직도 그대로라니 대단한 부부이구나, 천생연분은 저런 부부를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부러움을 넘어 존경심이 생깁니다.


 내가 그토록 부러워한 대상이 겉으로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도 합니다.

 건강하던 지인이 병으로 유명을 달리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잘 나가던 친구가 사고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는 연락을 받습니다. 그럴 때면 사는 게 별 거 있나 싶은 허무함이 듭니다. '살아 있을 때 건강하고 가진 것에 감사하며 행복하게 살아야지'라는 뻔한 다짐을 합니다. 당장 건강검진을 예약하고요.

 똑똑하고 야무져서 부러웠던 이웃집 자녀가 사춘기 때 방황하고 반항해서 골치 아프다는 하소연을 듣습니다. 어제까지 닦달한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똑 부러지지 않아도 그저 튼튼하게 잘 지내는 것만으로도 고마웠습니다. 내 새끼 최고! 하면서요.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가 남편을 존중하던 대단한 부부는 실상은 쇼윈도 부부라고 하네요. 집 안과 바깥 모습은 완전히 다르다고 합니다. 바가지 긁고 잔소리 많아도 가정을 위해 헌신하는 아내가 고맙게 느껴집니다.

 



 지나친 부러움은 질투로 바뀝니다. 질투는 시기를 부르고, 욕심을 불러옵니다. 자칫 집안에 평지풍파를 초래합니다. 남는 건 후회뿐입니다. 이 또한 지나면 잊힐 부러움인데도 평지풍파까지 일으키는 걸 보면 아직은 철이 덜 들었나 봅니다.


 평소 사는 대로, 하는 대로, 있는 그대로가 자연스럽고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없으면 없는 대로 노력해서 얻기도 하고요. 비교만 하지 않아도 먹고사는데 별 지장이 없다면 그걸로 감사하면서 말입니다.

 이런 마음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내일은 또 어떻게 바뀔지, 무엇을 보고 부러워할지 알 수 없습니다. 아직은 그런 경지까지는 멀었나 봅니다. 얼마나 더 살아야 초연할 수 있으려나.

 

 부러우면 지는 거라고 하죠. 한편 지고 사는 게 이기는 거라는 말도 있으니 부러움도 적당히 하려고요.

 부러움이 생기면 혼자 실컷 부러워합니다. 질투로 바뀌기 전까지만요. 그리고는 싹 잊어버립니다. 어차피 잊힐 부러움일 터이니 부러움에 지기 전에 미리 잊어버리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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