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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감의 기술 Oct 15. 2020

사람은 기억으로 살아갑니다

며칠 전,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들어서려는데 대문 앞에서 한참 동안 서 있었어요. 매일 드나들던 문인데, 어떨 때는 하루에도 여러 번 들락거렸는데 갑자기 현관 키 번호가 생각이 안 나더라고요.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번호가 기억났지만 새삼 우리에게 기억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를 생각해봤어요.


일단 사람들이 어울려 함께 살아갈 수 없을 거예요. 가족이 존재할 이유가 없습니다. 가족, 친구를 비롯한 가까운 사람을 만날 때마다 처음 보는 사람이 되니깐요. 아프리카 초원을 늘 혼자 떠돌며 생존하는 동물처럼 사람도 각자 살아가야 하겠죠.


기억이 없다면 열심히 살아야 할 이유도 없을 것 같아요. 성공하겠다는 집념도, 고비를 넘기기 위해 애쓰는 노력도 할 필요가 없을 거예요. 공부, 안 해도 됩니다. 지금도 외우자마자 금세 잊어버려 머리를 쥐어박는데 기억이 존재하지 않으면 하나마나잖아요. 공부를 안 해서 좋기도 하겠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죠.


한 편의 영화로, 마음에 드는 노래 한 곡만 있어도 될 것 같네요. 들을 때마다 볼 때마다 처음 접하듯 새롭게 감동받을 테니까요. 사람을 만나 즐겁게 웃고 떠들던, 잔뜩 스트레스만 받든 간에 모임이 없어지겠죠. 기억에 남지 않는 일상은 죄다 의미가 없잖아요. 돌아서면 잊어버릴 테고 내가 뭘 했는 줄도 모르니까요.


망각은 신의 축복이라며 아프고 쓰라렸던 감정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잊힙니다. 물론 사건 자체는 잊혀지지 않습니다. 머릿속에 그리고 마음에 꼭 담아둘 것들이 기억에 남으니까요. 소소한 추억들도 함께 있고요. 살아온 나날의 사연들이 시간과 동화되어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습니다.




사람은 기억으로 살아갑니다. 스마트폰에 번호를 찾다가 오래 전의 친구 연락처를 발견합니다. 한 시대를 동고동락하며 지냈던 친구, 허물없이 흉금을 터놓았던 사이. 다음에 꼭 연락하자며 주고받았던 번호는 폰 속에 고이 간직되어 있었습니다. 오늘따라 이 친구는 잘 있는지 무척 궁금해집니다. 보고 싶어 지네요.


기억은 추억으로 소환됩니다. 라디오에서 흘려 나오는 귀 익은 음악소리가 가던 걸음을 멈추게 합니다. 이 노래를 즐겨 듣던 시절로 들어갑니다. 사랑 노래 가사처럼 누군가를 뜨겁게 사랑했고 누군가를 한없이 그리워했습니다. 힘겨운 나날을 보낼 때 듣던 음악은 그 시절을 버텨낸 힘이었죠. 마치 엊그제 느낀 것 같은 아련함이 새삼 마음을 찡하게 합니다.


나이 들수록, 세월이 깊어질수록 때론 기억이 진해집니다. 마음속에 흩어져 있던 기억들이 노래 한 소절로, 우연히 찾은 전화번호에서 튀어나와 한 장의 사진처럼 찍혀 나옵니다. 함께 했던 감정까지 불러오죠. 그러고 보면 사람은 기억으로 사는 게 맞는 것 같아요.


기억이 있으니 그저 그런 일도 아름다운 향수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기억이 있으니 힘들었던 시련을 이겨낸 보람을 회상하고요. 기억이 있으니 내가 이 자리에 있습니다. 기억이 없다면 삶은 무미건조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기억을 한다는 건 삶을 소중하게 합니다.


1년 365일, 하루 24시간 1440분 동안 스치고 겪는 수많은 에피소드 중에 왜 하필 그때 그 장면이 기억에 남았을까요? 똑같은 일을 겪어도 저마다 기억은 다 달라요. 시간과 감정이 뒤섞여 때로는 완벽하지 않는 기억일 때도 있지만 나에게 남은 기억이 내가 살아온 흔적입니다.


특별할 거 없는 하루를 보내고 있는 중에도 문득문득 예전의 시간이 떠올라 잠깐 생각에 잠깁니다.

'그때 진짜 힘들었지만 그래도 잘 버텼지' 하며 일종의 무용담이 되고요.

'그때 참 행복했지' 하며 그리움에 잠시 빠지기도 합니다. 곧 훌훌 털고 오늘을 살아갑니다.


지금을 사는 오늘이 나중에, 몇 년 뒤에 무슨 기억으로 남을까요? 어떤 기억으로 떠오르면 좋을까요?

팍팍하다, 버겁다 싶은 날들이 나중에 가서는 우리에게 꽤 괜찮은 무용담이 돼줄지도 모르죠.

좋은 기억들은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어지는 오늘은 또 어떤 기억을 하나 더 쌓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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