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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감의 기술 Feb 22. 2021

버텨내지만 말고 즐겨내는 건 어떨까요?

즐겨냄

 삶에 찌든 사람이 푸념처럼 하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전생에 나라를 팔아먹었을까?"

 얼굴엔 미소가 끊이질 않고 사는 게 즐거워 보이는 이들을 보며 이런 말을 합니다.

 "저 녀석은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살다 보면 삶의 무게가 버거워 허우적거리기 일쑤입니다. 그러다 보면 산다는 게 전생에 무슨 큰 죄를 지어 이번 생에 벌을 받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지금 겪는 아픔이 끝은 있는지, 이렇게 죽어라 고생만 하는데 나중에 낙(樂)이라도 있을까 싶고요. 왜 사는지 모른 채 오늘도 근근이 버텨냅니다.  




 '이번 생에서 겪는 어려움은 내가 전생에서 진 빚이고, 이번 생에서 견디는 아픔은 나중에 후생에서 다 복으로 치환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번 생은 다들 처음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처음은 낯설고 서투르기 마련입니다. 더군다나 전생에서 진 빚까지 있다고 하니 이번 생은 빚만 갚는데 급급하다 끝날 것만 같습니다. 그러니 이번 생은 폭망이라는 체념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건가 싶고요. '인생은 고해'라는 말이 이런 이유로 생겨났나 봅니다.  


 하지만 지금 견디는 아픔이 다음 생에서 복으로 치환된다고 합니다. 이번 생을 잘 버텨 다음 생에서는 나도 ‘나라를 구했다’라는 소리를 듣는다면 그나마 위로가 되는 것 같습니다만 한편으로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난들 이번 생은 기억조차 못 할 텐데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 위로는 그다지 오래가지 않습니다.

 인생을 버텨내야 하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너무나 많습니다. 그럼에도 다들 다음 생에는 복으로 치환된다는 말을 믿고 살아간다고 합니다. 그렇게 믿어야 버틸 수 있기 때문이겠죠.


 버티는 아니 버텨내는 게 인생이라고 합니다. 이 말을 달리 생각해 봅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하는데 즐길 여력도, 즐길 상황도 아닐 때가 많습니다. 그럼 즐기지 못한다면 즐겨내는 건 어떨까 싶습니다.

 매서운 한파에 손발이 꽁꽁 얼고 잔뜩 어깨를 움츠린 한겨울에도 핫팩 하나가 주는 따뜻함으로 마음까지 포근해지고요, 김이 모락모락 나는 호빵 한입을 먹으며 입가에 미소를 짓습니다.

 무더운 한여름 열대야로 잠 못 들어도 시원한 소낙비에 잠시 더위를 식히고요, 얼음과 함께 아삭아삭 먹는 수박 하나로 온 가족이 오손도손 즐거움을 누립니다.


 즐겨낸다는 건 이런 의미가 아닌가 싶습니다. 고통과 슬픔 속에서도 즐거움을 열심히 찾아보면 즐거움의 작은 조각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고통뿐인 삶인 것 같아도 중간중간에 행복이 한 번씩은 찾아옵니다. 그 행복을 우리가 안 찾으려고 한 건 아닐까요? 혹은 관심이 없어서, 설마 나한테. 이런 생각으로 작은 행복들은 흘려버리지나 않았는지 돌아봤으면 좋겠습니다.  




 한 번뿐인 이번 생, 다들 잘 견디고 있습니까? 잘 버텨내고 계십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행복이 넘쳐나는 이들도, 속으로는 걱정 근심이 없을 수 없습니다.

 알고 보면 모두가 비슷비슷합니다.

 인생을 즐기기만 하면서 늘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늘상 행복하고 즐겁다면 그것도 약간 이상하지 않나요? 그럼 행복과 즐거움을 제대로 알기나 할까 싶습니다.

 슬픔이 겪고 나서야 기쁨을 만끽할 수 있는 게 인생인데 말입니다.


 지금 처해있는 상황이 어떻든지 간에 인생을 즐기면서 살 수 있다면 큰 축복입니다. 즐기기 힘들다면 즐겨내기라도 하면 팍팍한 인생에 재미가 붙지 않을까요? 행복도 만들어가는 거라고 하듯이 말이죠.

헤매고 실수하는 인생입니다. 매일 이불킥 날리며 분노의 양치질을 하면서도 아이의 해맑은 웃음을 따라 웃으며 다시 기운을 내어봅니다. 그게 인생살이 아닌가 싶습니다.

 즐기지 못한다면 즐겨내려는 마음이라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래도 어딘가 즐거운 순간들이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말이죠.


 앞으로 남은 날들은 내 인생을 칠할 수만 가지 색의 물감들 가운데 감사, 행복, 즐거움. 이런 이름의 색들을 꺼내서 열심히 칠했으면 합니다. 누가 칠해주지 않을 거니까 내가 열심히 그려나가야죠.

 그러다 보면 누가 압니까? 조만간 나를 보고

 "너, 전생에 나라를 구했냐?"라며 부러워할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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