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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밥, 오늘도 한 끼를 부탁해~

by 공감의 기술


내일은 소풍날입니다. 전날인데 마음은 벌써 들떠서 어서 아침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엄마랑 손잡고 시장에 갑니다. 입에 사탕 하나 물고 과자 몇 봉지와 김밥 재료를 삽니다. 그리고 김밥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사이다도 집어 듭니다.

소풍 가는 아침이면 엄마는 김밥을 싸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옆에 붙어 앉아 언제쯤 다 싸는지 지켜보다가 김밥을 썰고 난 꽁지가 생기면 얼른 내가 먹습니다. 소풍 가는 날, 김밥 없으면 소풍이라는 이름이 어울리지 않습니다. 일 년에 많아봐야 4-5번 먹을 수 있는 귀한 음식, 김밥입니다.


오늘은 연인과 데이트가 있습니다. 버스를 타고 인근 야외로 놀러 가기로 했습니다. 사랑하는 연인과 나눠 먹을 김밥을 쌉니다. 맛도 좋아야 하지만 모양도 이뻐야 하죠. 김밥을 좋아하려나 잠시 걱정이 들고요, 맛없으면 어쩌냐 괜히 신경이 쓰입니다. 그러면서도 한 줄 한 줄 쌀 때마다 흐뭇한 미소가 절로 지어집니다.

애지중지 싼 김밥을 들고 데이트를 즐깁니다. 한참을 놀고 나서 드디어 식사 시간, 수줍은 척하며 연인 앞에 김밥을 내놓습니다. 김밥을 보며 함박웃음을 짓고, 한 입 한 입 먹을 때마다 맛있다며 감탄을 들으면 세상을 다 가진 기분입니다.


세월이 흘렀습니다. 흐르는 세월 따라 세상도 많이 변했습니다. 김밥도 예외가 아닙니다.

단무지, 시금치, 당근에 계란. 거기에 소시지만 들어가면 고급 김밥이었습니다. 시장에서 구입한 재료로 정성 들여 만들었던 김밥은 이제 어디서나 손쉽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되었습니다. 웬만한 동네엔 00 김밥, @@ 김밥 집이 들어서 있으니까요.

들어가는 재료도 다양해졌습니다. 소시지는 자취를 감춘 지 이미 오래, 햄이 그 자리를 대신했습니다. 김치, 치즈, 참치, 돈가스까지 김밥도 각양각색의 재료와 손을 잡고 변신을 하고 있습니다.




한 젊은이가 김밥 한 줄 든 비닐봉지를 들고 김밥 가게를 나옵니다. 바쁜 일이 있는 듯 걸음도 빠릅니다. 저걸로 한 끼 때우려나 봅니다. 하긴 한 끼 때우는 걸로야 김밥만 한 게 없습니다.

다른 음식보다 저렴한 가격에 배를 채울 수 있고요, 한국인은 밥심을 산다고 하지 않습니까? 밥을 주재료로 여러 반찬을 한 번에 모아 만들었으니 먹기도 간편합니다. 적당한 포만감도 주고요, 먹고 난 뒤의 정리도 간단합니다. 영양가도 좋으니 한 끼 대용으로 딱인 음식입니다.


다들 먹고살 만한 세상이 되었는데 여전히 먹고사는 문제로 버거운 나날을 보냅니다.

먹고살려고 하는 일인데 일하는 시간에 쫓겨서,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공부하는 건데 밥 먹을 시간이 없습니다. 만사 귀찮아 꼼짝도 하기 싫지만 뭐라도 먹기는 해야 합니다. 그럴 때 선택의 1순위는 단연 김밥입니다.

넉넉지 못한 형편으로 돈에 쫓길 때도, 허기는 지는데 얼른 한 끼 먹어야 할 때도 김밥만 한 게 또 어디 있겠습니까?

김밥 집 김밥보다 더 빨리 배를 채울 수 있는 김밥도 있습니다. 주먹밥과 닮은 모양으로 값이 더 싸고 기다릴 필요도 없어 간단하게 한 끼 해결할 때 애용하는 삼각김밥입니다. 간편식 중에서 밥이 먹고 싶을 때 가장 빨리 찾을 수 있는 밥이기도 합니다.


근데 고작 김밥 한 줄 펼쳐 놓고도 편안하게 먹지를 못합니다. 그래도 한 끼 식사인데 온전히 집중을 못 합니다.

문서 작업하다가 한 개 먹고, 입에 한 입 물고 자료를 찾습니다. 김밥 한 알 먹으면서 눈으로는 책을 보며 문제를 풀고 있습니다. 점심시간을 갖지 못한 이들은 길을 가면서 김밥 한 줄을 게눈 감추듯 먹습니다.

예전 민주화 운동이 한창이던 시절을 배경으로 쓴 박노해 시인의 '눈물의 김밥'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안기부 지하 밀실에서, 방금까지 비명 터지던 고문장에서 참혹한 고문의 밤을 끝끝내 뚫고 떳떳한 목숨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목 메인 김밥을 씹어 먹는다는 내용입니다.

김밥으로 한 끼 때운다는 말이 이래서 나왔는가 봅니다.




소풍과 운동회 때 빠지면 안 되는 잔치 메뉴였던 김밥이 언제부터 시간에 쫓기면서 먹어야 하는 존재가 되었을까요?

엄마의 정성과 사랑이 담긴 음식이 어쩌다 목이 메는 음식이 되어버렸는지. 사는 게 팍팍해서, 인생이 고달파서 그렇게 됐을까요?


오늘도 세상은 김밥이 천국을 이루고 있습니다.

등산을 하기 위해 가장 먼저 들르는 곳이 김밥 집입니다. 지금 사는 김밥은 동네 뒷산 정상에서 먹을 거고요.

아이의 소풍날, 바빠서 김밥을 직접 싸주지 못하는 엄마가 미안한 마음으로 김밥을 구입합니다. 괜찮습니다. 그런 가정이 한둘은 아닐 테고 아이들도 이해를 하니까요.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기차역에는 차 시간을 놓치지 않으려고 급하게 뛰어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부득이하게 식사 시간을 놓친 그들의 손에는 김밥 한 줄이 들려 있습니다.

어둑어둑해진 저녁에 황급히 김밥을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늘 밤 잔업할 때 일용할 양식이 되어줄 김밥입니다.

시간에 쫓겨서, 돈에 쫓겨서, 허기에 쫓겨서, 귀찮음에 마지못할 때도 김밥은 한 끼를 거뜬히 책임져줍니다.


코로나 판데믹으로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재택근무하는 아빠, 원격 수업하는 아이, 그리고 엄마가 뭘 먹을까 마땅히 떠오르지도 않고 배달음식도 지겨울 때 함께 김밥을 만듭니다. 김밥으로 여러 캐릭터를 만들어 보고요, 요즘 유행하는 접는 김밥도 도전해봅니다. 김밥 만들면서 다 같이 웃고 먹으면서도 집안에 웃음이 떠나질 않습니다. 재미와 허기를 동시에 해결하는 이 순간, 여기가 천국이 아닐까 싶습니다.




예전에는 엄마가 싸준 김밥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었습니다. 김밥 파는 가게도 없었고 일 년에 몇 번 먹을 수 없는 음식이기도 했으니까요.

지금은 고개만 돌리면 찾을 수 있는 음식점이 김밥 집입니다. 입맛에 따라 취향에 따라 다채로운 김밥으로 오늘 한 끼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김밥은 아내가 만들어 준 김밥이 제일 맛있습니다. 왜냐면 무조건 그렇게 말해야 합니다. 하얀 거짓말 몇 마디로 천국을 지킬 수 있으니까요.


한동안 먹지 않으면 문득 먹고 싶어 지는 김밥에게 이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오늘도 한 끼를 부탁해~”






사진출처

- 김밥송, 깨이키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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