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급 보릿고개
몇몇 직장인들이 모여 월급 이야기를 합니다. 연말이니 보너스가 나올까 하는 기대도, 올해는 회사도 어려운데 월급이 제때 나온 건만 해도 감지덕지 아니냐는 현실적인 발언도 나옵니다. 다들 움츠려들 수밖에 없는 요즘, 월급으로 시작된 돈 이야기는 뾰족한 결론도 없이 뽀얀 담배연기와 함께 허공으로 날아갑니다.
‘보릿고개’라는 말은 들어보셨을 거예요. 보릿고개를 직접 겪은 연세 지긋한 분들도 계실 거고요.
보릿고개는 지난해 가을에 수확한 양식이 바닥나고, 올해 농사지은 보리가 미처 여물기 전인 5 ~ 6월, 식량 사정이 매우 어려운 시기를 말합니다. 춘궁기(春窮期), 맥령기(麥嶺期)라고도 불렀습니다.
일제 강점기의 식량 수탈과 민족의 비극인 한국 전쟁으로 인해 당시 사람들은 극심한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추수 때 걷은 농작물 가운데 소작료, 빚, 이자, 세금 같은 비용을 다 떼고 난 다음 남은 식량으로 이듬해 초여름 보리 수확 때까지 견디기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 풀뿌리나 나무껍질로 끼니를 때우거나 걸식을 하고요. 유랑민이 되어 떠돌아다니기도 했던 굶주림이 일상이었던 시절입니다.
근래에 와서는 경제성장과 함께 생활환경이 나아져 보릿고개는 역사책이나 사전에서 나오는 말이 되었지만 이 보릿고개는 1960년 대까지만 해도 연례행사처럼 찾아왔습니다.
경제가 발전하고 먹고사는 문제가 나아졌습니다만 보릿고개가 다시 등장했다는 기사가 눈길을 끕니다.
직장인이 월급을 받고 그 월급을 다 쓰는데 걸리는 시간이 평균 12일이라고 합니다. 많은 직장인들이 월급날로부터 12일이 지나면 통장이 텅(빈 통)장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조사기관에 의하면 직장인 10명 중 9명 정도는 다음 월급일 전에 월급을 다 소진하는 `월급 보릿고개`를 겪은 적이 있다고 하고요, 이 중 5명은 매달 겪는다고 합니다.
매달 30일이 월급날이었으면 지금쯤 웬만한 직장인은 빈털터리가 되어 있겠는데요, 하긴 오늘 월급을 받아도 내일이면 다시 월급날만 기다리는 게 직장인의 애환이요, 버티는 힘입니다.
월급이 통장으로 들어오자마자 카드며, 대출이며, 이자, 공과금, 교육비까지 알아서들 착착 빼갑니다. 더군다나 작년까지만 해도 월급 받고 버티는 날짜가 16일 정도였는데 올해는 코로나 여파로 12일로 줄어들었다고 하니 다들 먹고사는 문제가 더욱 힘겨워진 요즘입니다.
아껴도 줄어들지 않는 생활비, 아이 성적하고 월급만 빼고 다 오르는 물가와 이자로 살림살이는 팍팍하기만 합니다. 월급 보릿고개가 닥쳐오면 신용카드로 돌려 막기도 하고요, 무조건 아끼고 집 밖을 아예 안 나가기도 해 보지만 돈은 어디선가 필요로 하니 마이너스 통장을 쓰는 사람도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월급 이야기를 하다 월급을 다 쓰는 기간이 12일이라는 말에 저마다 한 마디씩 합니다.
"12일? 부럽다. 나는 이것저것 다 내고 나면 12시간이면 텅장이 돼요." 하는 후배의 푸념이 들려옵니다.
"저는 지금 통장 잔고가 5900원 남았습니다."라고 허탈해하는 동료도 있습니다.
좀 아껴 쓰라며 계획을 짜서 소비를 하라는 여쭙잖은 조언을 합니다. 그랬더니 자조가 뒤섞인 목소리가 터져 나옵니다. 다들 아껴 쓰면서 돈 좀 모으고 싶어 합니다. 허리띠를 졸라 매고 아끼기에 돌입하지만 5월이면 가정의 달이라 아이들, 부모님, 어떤 때에는 스승님까지 챙겨야 하니 모았던 돈은 한꺼번에 나가버리고요. 여름이면 휴가, 민족의 대이동이 일어나는 설과 추석 연휴, 연말이면 크리스마스와 새해 첫날. 곳곳에 돈 나갈 곳은 포진해있습니다. 불쑥 찾아오는 결혼, 장례 같은 경조사로 나가는 비용도 만만치 않습니다. 평소에 티끌 모아 태산은 아니어도 작은 언덕을 만들어본 들 오래가지도 않아 지출은 불가피합니다.
통장 잔고가 5900원 남았다는 후배에게 '그래도 스벅 커피 한 잔은 할 수 있어 좋겠네?'라며 썰렁한 농담으로 마무리를 합니다. '그게 좋아할 일인가요? 그러니 꼰대 소리 듣지' 하는 눈빛이 역력합니다.
흔들리는 꽃들 속에서 샴푸 향이 남아 있다는 노래가 들립니다. 낭만적이다 싶은데요. 현실은 스쳐가는 월급 속에는 카드 항만 남아 있습니다. 카드 향이면 다행이게요, 어떤 때는 카드 향이 악취인 듯싶습니다.
카드, 대출, 마이너스로 일관되는 직장인의 빚, 예전에는 보릿고개가 있었다면 지금은 월급고개가 있는 셈인데요, 이 고개를 겪지 않으려면 월급을 평소보다 154만 원 정도 더 받아야 한다는 통계도 있습니다. 팍팍한 현실이 그렇다는 얘기입니다.
다들 대출 빚, 카드 빚. 빚. 빚에 쪼들리는 인생입니다. '빚'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만 찍으면 '빛'이 되는데 점 하나 찍기가 왜 이리 힘든지 모르겠습니다. 빚지고 사는 인생이 점 하나를 찍어 '빛'이 되는 날을 기대하며 어려워도 힘들어도 어쨌거나 오늘도 하루를 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