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몇 주 전에 만나 같이 술도 한잔했는데 갑자기 전화가 와서 뭔 일인가 싶었습니다. 하는 일이 달라 서로 부탁할 사이는 아니었거든요.
요즘은 전화받을 때 '여보세요'라는 말은 잘 안 쓰죠. 핸드폰에 연락처와 이름이 뜨니까 "어" 하며 받았습니다. 그러고는 왜 전화했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녀석은 싱거운 대답을 합니다.
"그냥"
어이가 없어서 할 말을 잃었는데 친구가 대뜸 이렇게 묻습니다. 전화 왜 받았냐고 말입니다. 얼떨결에 받은 질문이라 얼떨결에 나도 이 말이 나왔습니다.
"그냥"
그러고는 둘 다 웃었습니다.
문득 오랜 친구가 생각나서 만만한 친구들에게 전화를 돌렸답니다.
받으면 좋고 안 받으면 그만이다 하면서요. 거는 사람도 그냥, 받는 사람도 그냥.
부담이라고는 1도 없는 오랜 친구이기에 가능한 대화입니다.
격식을 차려야 하는 만남은 이익이 있나 없나가 주된 관심사입니다.
사방에서 돈 버는 법은 가르쳐주지만 어떻게 살 것인가를 배울만한 곳은 눈에 띄지 않습니다.
의학의 발달로 인생을 사는 시간은 늘어났지만 시간 속에 삶의 의미를 찾는 법은 잃어버렸습니다.
이익을 추구하고 먹고살기는 더 편해졌지만 따뜻한 관계 맺기는 힘들어졌습니다.
아는 사람은 많아졌지만 마음을 여는 사이는 점점 줄어듭니다.
관계에서 상처 받는 일도 허다합니다.
틀에 박힌 조직에서 생존을 위해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줘야 할 때도 있습니다. 앞에서는 항상 미소를 지은 얼굴로 대하고 있지만 뒤에서는 누가 뒤통수를 치지 않을지 나를 밟고 올라서는 인간이 없는지 촉각을 곤두세웁니다. 자칫 삐거덕거릴지 몰라 늘 불안 속에 경쟁을 멈추지 않습니다. 긴장의 연속, 아슬아슬한 줄타기 인생은 오늘도 계속됩니다.
공자님이 친구에 대해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유붕이 자원방래하니 불역락호아." 친구가 멀리서 찾아오니 즐겁지 아니한가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친구란 그저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보다는 함께 살아온 세월만큼이나 별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헤아려주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그런 이를 오랜 친구라고 부릅니다. 마음을 알아주는 친구가 나를 찾아온다고 하니 반갑고 즐겁지 않겠습니까.
오랜 친구를 만나면 좋은 점이 많습니다.
격식을 차리지 않아도 되니 부담이 없습니다. 울리는 변죽을 맞춰주지 않아도 되고요, 또 빈말 대신 반말로 허물없이 주고받는 게 좋습니다.
무엇보다 오래전 함께 한 시절부터 지금까지 숱한 세월을 보냈으면서 여전히 애정과 격려를 받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무구한 다정다감함, 무조건적인 믿음, 이런 게 우리를 살아가게 합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하는데 오래 친구는 그럼 어떤 인연이었을까요?
오늘은 기분이 꿀꿀했는데 그냥 전화한 친구가 고마웠습니다. 싱거웠지만 주고받은 ’그냥’이라는 말로도 스르르 풀립니다.
마음이 심란할 때는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랜 친구들은 예외입니다.
끝자락이지만 아직도 청춘이라고 우기는 30대도, 원숙미를 만들어간다지만 실제로는 하루가 다르게 늙어가는 40-50대 중년도, 꼰대를 지나 백세를 향해 싫어도 가고 있는 60-70대 노년들까지 나이와 상관없이 오랜 친구를 만나면 다들 한결같은 모습을 보입니다. 사회적 위치도 벗어버리고요, 체면도 필요 없고, 지위 고하도 의미 없습니다.
밥을 먹고 소주잔을 기울입니다. 씨잘 대기 없는 농담을 시작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추억 여행을 떠납니다. 혈기왕성한 청춘도, 중년의 원숙미도, 노년의 노련함도 온데간데없이 모두 그 시절 철부지 개구쟁이로 돌아갑니다. 네 기억이 맞니 안 맞니 우기다가 토라집니다. 때론 친구의 아픔은 나의 아픔이 되어 같이 아파합니다. 그러다 한바탕 웃고 떠들며 술잔을 듭니다. 살아가는 맛이고요, 힐링은 덤입니다.
오해를 해도 곧바로 이해로 바꿀 수 있는 사이,
이름 대신 '야', '니', '인마'. 누구를 지칭하지 않아도 알아서 듣고 그 호칭이 절대 기분 나쁘지 않은 사이,
몸도 낡았고 마음도 너덜너덜해졌지만 우리만큼은 소중해서 정답고, 그 정으로 뭉친 사이,
혈기왕성하던 모습은 이제 찾아볼 수 없지만 언제나 그 자리에 늘 곁에 있어준 오랜 친구가 든든하고 고맙고 소중합니다.
웃어도 알고, 울어도 아는 친구,
그냥 있는 모습 그대로만으로도 좋은 친구,
그들 앞에서는 내가 바보가 되어도 흐뭇한 친구,
오랜 친구만이 나눌 수 있는 찐한 우정입니다.
세상은 급변하게 바뀌고 어제의 세상은 낡은 세상이 된 오늘입니다.
최신 기기, 최신 지식, 최신 기술, 새로운 관계, 새로운 도전, 새로운 삶이란 말들이 세상을 도배합니다.
최신과 새로움과는 어울리지 않는 해묵은 나무 같지만 오래되고 낡아빠진 이 친구들이 소중합니다.
오랜 친구, 살아온 세월과 함께 얻었으니까요.
오늘은 내가 오랜 친구들에게 전화를 해보려고 합니다. 왜 전화했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뻔합니다.
"그냥"
어느덧 해묵은 나무가 되어버린 오랜 친구에게 연락 한번 해보시면 어떨까요?
오늘도 아름다운 시절로 남기를 바란다면 말이죠.
받으면 좋고 안 받아도 그만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