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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감의 기술 Aug 09. 2021

입추가 지난 자리, 가을이 오는 소리

 한겨울 추위에 온몸이 꽁꽁 얼어붙었습니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도, 꿋꿋하게 서있는 나무도, 길을 걷는 사람들도 얼어붙기는 매한가지입니다. 추워도 너무 추워 밖을 돌아다니기가 두렵습니다. 살을 에는 추위에 얼른 집으로 들어가려는데 맞은편 이웃집 대문에 걸린 사자성어가 눈에 들어옵니다.

 "입춘대길(立春大吉)"

 오늘이 입춘이라고 합니다. 봄이 시작된다는 입춘, 갑자기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벌써 봄이라니, 봄 소리만 들어도 기분이 넉넉해집니다만 밖에는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습니다. 이 눈이 밤사이 영하의 날씨에 얼어붙으면 내일 출근길은 어떡하나, 벌써부터 걱정이 밀려듭니다. 입춘이 맞나 싶습니다. 


 최근 날씨를 보면 제정신이 아닌 듯합니다.

 작년에는 사상 최장기간 장마라며 두 달 넘게 비만 맞고 살았습니다. 이어진 겨울에는 눈이 엄청 많이 내렸고요. 99년 만에 벚꽃이 가장 일찍 핀 봄이 올해라고 합니다. 해마다 열리는 벚꽃 축제가 시작하기도 전에 벚꽃은 다 피어버렸습니다.

 올여름은 장마가 시작되기 전부터 툭하면 비가 내리더니 장마는 언제 지나갔는지 모를 만큼 짧게 끝났습니다. 끝나자마자 날씨가 더위를 먹은 마냥 찜통더위가 장난이 아닙니다. 


 더워도 너무 더워 말할 기운도 없습니다.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시며 더위를 달래고 있는데 TV 기상 캐스터가 한마디 합니다.

 "무더위가 여전히 기승을 부린 하루였지만 오늘이 절기상 입추입니다."

 오늘이 입추? 그럼 이제 곧 가을이구나 하는 생각에 더위가 금방이라도 물러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오늘도 내일도 우리나라는 여전히 찜통더위에 열대야라고 합니다. 절기는 가을에 들어서는데 아직도 찜통더위에 열대야라니. 입추가 맞기나 한 건지 기상 캐스터도 더위를 먹어 잘못 말한 건 아닌가 싶었습니다.  




 입춘(立春) 그리고 입추(立秋)

 이 두 글자를 유심히 쳐다봅니다. 입추의 입자는 들어간다는 들 입(入) 자를 쓰지 않고 똑바로 선다는 설 입(立) 자를 씁니다. 그러니까 입춘이나 입추는 봄이나 가을에 들어간 게 아니라 머지않았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입추 간판을 달았다고 세상은 금방 가을이 되는 건 아닙니다. 


 절기상 입추는 여러 의미와 풍습이 있습니다.

 입추는 '벼 자라는 소리에 개가 짖는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벼가 빠르게 자라는 시기라고 합니다.

벼가 잘 익어야 풍성한 수확을 거둘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청명한 날씨가 계속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조선 시대에는 입추가 지나서 비가 닷새 이상 계속 내리면 하늘에 비를 멎게 해 달라는 기청제를 올렸다고 전해집니다.

 입추의 날씨를 보고 점을 치기도 했습니다.

 하늘이 높고 푸르면 올가을엔 풍년이 든다고 좋아했습니다. 비가 조금만 내리면 길한 반면 비가 많이 내리면 흉년이라 여겼습니다. 또한 천둥이 친다면 벼의 수확량이 적을 거라는 걱정을 했고, 지진이 나면 다음 해 봄에 소와 염소가 죽는다고 믿었다고 합니다.

 입추는 본격적인 가을 준비를 시작하면서 김장용 무와 배추를 심었다고 합니다. 


 가을 하면 결실의 계절이라고 부릅니다.

 한 해 동안 애써 지은 농사를 수확하는 계절, 한 해 동안 열심히 공부한 노력을 결과로 보이는 계절이기에 입추는 곧 다가올 가을을 잘 준비하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봄이 시작되니 크게 길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써 붙였던 입춘대길, 이 4글자를 떠올려봅니다.

 엄동설한에 간절히 기다렸던 봄은 이미 떠나보냈고 지금은 뜨거운 여름 한복판에서 맞이한 입추.

 올 한 해 이루고 싶었던, 크게 잘되기를 바랐던 소원은 어디까지 왔는지 돌아봅니다. 얼마 안 있으면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천고마비의 계절 가을에, '올 한 해도 이렇게 저물어가는구나, 나는 뭘 했을까?' 해마다 되풀이했던 후회는 덜 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면서요.  




 입춘대길을 대문에 붙이자마자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렸습니다. 겨울 추위에 이미 떨 만큼 떨었지만 꽃샘추위도 역시 만만치 않았습니다. 몸을 더 움츠러들게 하지만 그래도 이제 곧 봄이 온다는 기대, 봄이 와서 꽃은 피어날 거라는 사실에 추위를 이겨냅니다. 그리곤 우리도 꽃을 피웠습니다. 웃음꽃도 피우고 이야기꽃도 피우면서 일상의 꽃, 번영의 꽃을 피우기를 소망했습니다. 


 절기상 입추라고 하지만 여전히 불볕더위에 열대야는 수그러들 줄 모릅니다. 덥지만 입추라는 말 한마디에 이 더위도 곧 물러갈 거라는 사실이 위로가 되고 조금만 더 버티자는 용기도 내어봅니다.

 입추를 맞이한 오늘, 우리가 만난 건 가능성입니다.

 아직은 아니지만 머지않아 가을이 오니 결실을 잘 맺을 준비하라는 그런 뜻이죠. 


 가을의 가능성이 우리에게 주어졌으니 이제 찾아 나서야 합니다.

 우리가 소망했던 일상의 꽃, 번영의 꽃이 활짝 피어나길 바라면서요. 수확의 계절에 후회를 남기지 않으려면 말입니다.

 입추가 지난 자리, 가을이 오는 소리 들리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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