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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감의 기술 Oct 18. 2021

비우고 돌아가야 할 때, 10월의 단상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

 뜻 모를 이야기만 남긴 채 우리는 헤어졌지요~'

 10월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노래, '잊혀진 계절'의 한 소절입니다. 


 9월이 가을의 시작이라고 하지만 여름과 힘겨루기가 한창입니다. 낮에는 오히려 무더운 기운이 가을을 무색하게 합니다.

 10월이 되면 풍경부터 달라집니다.

 색깔은 아직 녹색이지만 이미 물기가 빠진 나뭇잎들은 바람이 불 때마다 흔들리며 버석거리는 소리를 냅니다. 짙은 실록, 혈기왕성하며 생기발랄했던 여름이 지나간 자리에는 이제 비우고 돌아가야 할 때를 아는 이의 뒷모습처럼 고독의 계절, 가을이 비로소 채웁니다. 


 옷차림이 변하고 두꺼운 이불을 꺼내는 달이 10월이고요.

 단풍의 절정도, 첫서리가 내리는 달도 10월입니다.  




 계절이라는 게 참 그렇습니다.

 엄동설한에 굴하지 않고 얼어붙은 땅을 비집고 나오는 노란 새싹을 보며 생명의 신비를 경험합니다.

 봄날 아지랑이 속에서는 꿈을 꾸게 됩니다. 막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를 보면 그 어떤 가능성도 다 피어오를 것 같습니다.

 '뭔가 할 수 있다'라는 자신감처럼 말이죠.

 여기저기 마구 쏟아지는 만물이 소생하는 봄기운을 느끼곤 합니다. 


 봄처럼 활동하기 좋은 계절이지만 가을은 분위기가 사뭇 다릅니다.

 쌀쌀한 바람을 맞으며 낙엽이 흩날리는 거리를 거닙니다. 떨어지는 낙엽을 보며 고독한 체념, 뒹구는 낙엽을 밟으며 성숙한 포기도 듭니다.

 '그래,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하는 단념처럼 말이죠. 


 일 년 내내 나뭇가지에 붙어 있던 열매가 탐스럽게 익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열매가 다 그렇지 않습니다. 

 모진 바람에 떨어져 뒹구는 열매, 누군가 따버린 열매, 끝까지 잘 붙어 있었지만 볼품없이 맺은 열매도 있습니다.

 그렇죠.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니까요. 모든 게 좋을 수만은 없습니다. 그러니 누구를 탓할 일도 아닙니다. 


 화려했던 자태는 온데간데없이 초라한 흔적만 남은 꽃들을 봅니다. 일 년 내내 푸르름을 간직했던 나무들은 쓸쓸해 보입니다. 꽃도 지고 낙엽도 지고 점점 야위어가는 나무들이지만 볼 때마다 왠지 모를 기품이 느껴집니다.

 오랜 시간 동안 낡고 해지고 닳고 닳아 보잘것없는 모습이지만 그 내면에는 부지런히 갈고닦고 어루만지며 다음을 준비하는 내공 말입니다. 마치 반들반들 윤기 나는 옛날 집 같은 그런 느낌입니다.  




 다른 계절보다 유달리 가을이 되면 무슨 말이든 앞에 가을을 즐겨 붙입니다.

 가을바람, 가을 하늘, 가을 구름, 가을 공기, 가을비, 가을 사랑, 가을 정취. 어디에다 갖다 붙여도 어색하지 않고 운치가 있습니다. 가을만이 가지는 특권 같습니다.

 꽁꽁 얼어붙은 겨울, 만물이 소생하는 봄, 욕망과 격정의 계절 여름을 지나 찾아온 가을. 가을은 이 모든 걸 쏟아부어 열매 맺는데 온 힘을 기울입니다.

 있는 힘껏 한 만큼, 애써 돌본 만큼, 그만큼 열매를 거두는 시기라 그런지 가을 가을 하면서 한숨 돌리며 고마움이 절로 드는 계절입니다. 


 가을에도 장마가 있고 태풍도 심심찮게 찾아옵니다. 가을장마, 가을 태풍은 영 탐탁지가 않습니다. 며칠째 계속 비가 내리기도 하고 태풍이 휩쓸고 지나갈 때도 있습니다.

 더군다나 한파와 가을이 만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지금이 64년 만의 가을 한파라고 하니 가을은 참 대단합니다. 태풍도 한파도 모두 겪을 수 있는 유일한 계절이니 말입니다.

 그런들 어떡합니까? 비도 태풍도 한파도 지나가기 마련이고 그때까지 다 견뎌내야 합니다. 다만 조금 비껴갔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지면서요.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도 다를 바 없습니다. 아프고 슬프고 힘든 날도 있기 마련, 그러니 지나가기를 바라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이왕이면 얼른 빨리, 조금이라도 비껴가기를 바라면서 말이죠. 


 하늘은 높고 말은 살이 찌는 천고마비의 계절, 하지만 나무와 꽃들은 서서히 처음으로 돌아갑니다. 마치 내려놓고 비우기를 시작하는 몸짓 같습니다. 그런 가을의 나무와 꽃과 풀을 보면서 인생의 무상함에 담긴 의미도 깨닫습니다.

 영원한 것은 없다는 진리와 더불어 때가 되면 비울 줄 알아야 한다는 지혜 같은 거죠. 그리고 언젠가는 다시 채울 수 있는 희망도 함께 가져봅니다.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오늘도 내면을 부지런히 갈고닦는 이치를 배웁니다.  




 겨울로 가는 가을, 가을은 곧 다시 만날 사람인데도 헤어지면서 그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 있는 사랑하는 사람 같습니다. 얼굴은 웃고 있었는데 돌아서서는 터벅터벅 걷는 모습을 보면서요.

 만나면 헤어지고 헤어지면 다시 만날 거라는 걸 알게 하는 가을은 뒷모습의 시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안부를 묻는 사람들로 인해 삶의 온기가 더 부드럽게 퍼지는 계절이 가을입니다. 


 가을이 점점 무르익어 절정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아름답게 단풍이 들어 낙엽으로 지면서 세상은 빨갛게, 노랗게 물들어 가고 있습니다. 10월은 아름다운 가을을 더 아름답게 수놓는 계절입니다.

 예년과 달리 64년 만에 찾아온 가을 한파. 혹시 올해는 가을은 패싱하고 겨울이 바로 오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직 가을의 절정을 만끽하지 못했는데 말입니다. 


 10월도 함께 누린 시간을 기억하면서 추억으로 서서히 물들어 갑니다.

 비우고 돌아갈 때를 아는 10월의 가을, 다음을 기약하는 내공을 홀로 갈고닦으면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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