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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감의 기술 Jul 22. 2022

월급 루팡도 처음엔

"뽑아만 주시면 열심히 하겠습니다!"

 갖고 싶은 걸 사기 위해 눈을 뜨면 일터로 갑니다.

 배고프지 않으려고 눈을 부릅뜨고 열심히 자리를 지킵니다.

 오늘도 먹고살기 위해 쉼 없이 각자의 위치에서 성실히 맡은 바 역할을 수행합니다. 물론 설렁설렁 대충대충 하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요.  




 '단군 이래의 최대의 불황이다', '지금보다 더 무서운 위기가 닥친다', '취업 불안이다', '노후 불안이다'라며 남녀노소 누구나 힘들다고 아우성인 요즘, 어렵게 얻은 최종 면접에서 긴장감 못지않은 실망감을 감출 수 없습니다.

 아무리 취업이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지만 지원자를 하인 내려다보듯, 끽소리 못하는 갑과 을의 관계로 대하는 듯한 면접관의 태도에 빈정이 상합니다.

 젊은 패기 하나로 순수한 열정으로 무장한 미래의 인재를 회사가 동료로 맞이한다는 기쁨까지는 바라지 않지만 '우리가 너를 뽑아 주기를 바래? 그럼 너를 왜 뽑아야 하는지 증명해 봐, 우리 마음에 쏙 들게 보여 보라고!' 같은 거들먹거림이 느껴져 기분이 영 좋지 않습니다. 


 대의를 위한 정의감, 투철한 사명의식, 조직에 꼭 필요한 인재임을 구구절절 어필하는 것보다

 "넵, 저는 보시다시피 신체 건강해서 시켜만 주시면 뭐든지 다할 수 있습니다. 죽으라면 죽는 시늉은 물론이고요, 이 한 몸 조직을 위해 장렬히 불사르겠습니다!"

 무슨 노예 선발 대회도 아닌데 이런 말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 면접관의 표정이 실망스럽습니다. 그 표정을 얻으려고 애쓰는 자신이 안쓰럽지만 오랜 백수 생활을 청산하느냐 마느냐 갈림길에 선 이 순간은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닙니다. 


 "뽑아만 주신다면 열심히 하겠습니다."

 두고 보면 금방 뽀록날 거짓말인데,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도 없을 것 같은 말이지만 맨 처음 외칠 때는 절실함이 담긴 진심이었습니다. 하지만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마음이 다르다는 말처럼 간절했던 초심이 멀쩡한 거짓말로 둔갑해 버리는 일, 세상에는 흔히 일어납니다.  




 명탐정 셜록 홈스의 최대 라이벌 하면 루팡입니다. 큰 도둑이라고 해서 대도라고 불리는 루팡에게는 간절한 소망이 있었습니다.

 그건 일 안 하거나 최대한 일은 적게 하면서 월급은 꼬박꼬박 받는 것이었습니다. 일명 '월급 루팡'이라고 하는데 직장인 열 명 중 일곱 명은 월급 루팡이라는 설문 조사도 있습니다. 


 뽑아만 주신다면 뭐든지 다하겠다는 맹세는 오간데 없이 월급 루팡의 행태는 근무 시간에 딴짓은 기본, 하는 일도 없으면서 상사만 보이면 엄청 바쁜 척하기, 자신의 업무는 최대한 동료나 부하 직원에게 미루기 등이라고 합니다. 신입 사원뿐만 아니라 상사, 간부, 임원들까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그 누구도 언제든지 변신 가능합니다.

 얼마 전 실시한 일본의 모 설문조사에서 일본의 20, 30대 직장인들 중 절반가량이 "우리 회사에 일하지 않는 아저씨가 있다"라고 말할 정도이니까요. 게다가 응답자의 30%는 '나중에 자신도 일하지 않는 아저씨가 될 것 같으냐?'라는 질문에 '그렇다'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비단 일본만의 문제는 아닐 테죠. 


 맡은 일도 제대로 안 하는 주제에 월급은 꼬박꼬박 챙겨가는 걸 보고 루팡 같은 도둑놈이라는 뜻인 월급 루팡, 그런데 이 말이 심심찮게 부당하게 사용되기도 합니다.

 아침 일찍 출근, 밤늦게 퇴근하게 하면서 점심, 저녁은 도시락이나 라면으로 때웁니다. 월화수목금금금, 야근은 기본, 주말은 반납, 불철주야로 일을 시킵니다. 그래 놓고선 그 직원이 꾸벅꾸벅 졸고 있는 걸 보고 월급 루팡이라고 타박하면 곤란합니다.

 불경기에 몸이 부서져라 열심히 뛰어다녔지만 실적이 나오지 않았다고 싸잡아 월급도둑이라고 비난하면 그나마 있는 의욕마저 사라집니다. 더군다나 명색이 루팡은 대도둑인데 좀도둑 수준인 월급을 루팡에 갖다 붙여 도둑이라고 몰아붙이면 일할 맛이 안날 테죠.  




 배불리 먹었으나 돌아서면 또 배가 고파지고, 월급을 받았지만 눈 깜짝할 새에 통장이 텅 비니 이게 뭔 조화인가 싶습니다.

 일상을 꾸려 나가는 게 다 이렇지 않을까요? 기껏 애써 채웠는데 어느 순간 텅 비고, 먹어도 돌아서면 허기가 지듯이 이 걱정이 없어지면 저 걱정이 생기고, 근심거리를 하나 해결했더니 골칫거리가 또 튀어나옵니다. 그렇게 애쓰다 흘러 보낸 시간들을 생각하면 인생이 허무해집니다만 그래도 일용할 양식을 먹고 일용할 근심을 떨치고 일용할 욕망을 다스리며 하루하루 살아갑니다. 때가 되면 나왔다가 금세 사라지는 월급으로 말입니다.

 쥐꼬리만 한 월급이라고 푸념하지만 또박또박 나오는 월급으로 일용할 양식을, 일용할 배움을, 일용할 재미를 누릴 수 있는 거니까요. 


 사회 이슈가 되어 버린 일자리 문제의 심각성도, 조직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열정과 노력도, 이를 뒷받침하는 일할 분위기도 모두 중요하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하루아침에 뚝딱 해결될 문제도 아닐 테고 해결될 때까지 무작정 기다릴 수만은 없습니다.

 열 명 중에 여섯일곱은 월급 루팡이라고 하지만 자칭 타칭 월급 루팡들도 월급의 소중함을 모르지 않습니다. 월급 루팡이라는 눈칫밥을 먹으면서도 자리를 꿋꿋이 지키는 걸 보면 말이죠.  




 월급 루팡도 처음에는 큰소리로 이렇게 외치며 각오를 다졌을 겁니다.

 "뽑아만 주시면 열심히 하겠습니다!"

 힘을 합쳐 도우며 살아가도 힘에 부치는 세상입니다. 그러니 월급 루팡, 루팡 자체를 하지 말고 성실하게 맡은 바 역할을 감당하며 서로를 위하는 마음가짐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잃어버린 초심을 다시 되찾는 일, 마음속에 있는 월급 루팡이 설자리는 사라질 테니까요.  




사진 출처 : 구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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