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효준이랑 시현이 2살, 3살 사진이 왜 없지? 애들이 어떻게 컸는지 기억이 안나"
2012년 큰 아이를 낳고 법적으로 90일간 보장되어 있는 출산휴가 기간 중 60일만 쉬고 조기복직을 했다. K사장은 아이를 낳은지 일주일 밖에 안지났는데도 언제 출근하냐며 나를 닥달했고 출산 후 복직을 반기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와 특별한 기술없는 사무직은 나보다 나이어린 대체인력을 찾기 쉬웠기 때문에 불안했다.
육아를 담당해주실 줄 알았던 시어머니는 거리상의 이유, 건강상의 이유로 손자를 봐주기 어렵다는 소식을 전하셨고 발등에 불이 떨어진 나는 급하게 베이비시터를 구했다. 엄마의 빠른 복직 때문에 큰 아이는 생후 60일부터 베이비시터의 손에 맞겨졌고 6개월부터 단지 내 어린이집 등원을 했다.
내 사랑 큰 애기 춘이
딸 아이도 돌이 지나자마자 어린이집에 입소를 했다. 작은 아이도 엄마의 재취업 때문에 아이돌봄 선생님의 도움을 받았다. 하지만 엄마와 애착이 안정적으로 형성되지 않은 딸은 가족이 아니면 돌보기 힘든 아이였다. 남편은 아침마다 울음이 긴 딸아이, 엄마만 찾는 아이를 달래는 일이 너무 힘들다고 했지만 그저 크는 과정이라고 간단하게 생각했다. 아침마다 출근할 곳이 있다는 것이 그저 좋았다. 일하는 여자 사람, 아이가 있어도 커리어를 멋지게 이어가는 능력있는 여자로 보여지는 것 자체가 만족스러웠다.
내 사랑 작은 아이 빡이
그러던 어느 날, 이 생활을 5년을 한다고 하니 갑자기 내 인생이 불행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회사가 잘 된다고 해도 나는 여전히 새벽 5시에 일어나 왕복 80km를 오가며 남을 위해 일해야 했다. 사람이 드글드글한 경매시장 같은 사장실 앞에 붙박이장처럼 앉아 매일 아침에 비워놓은 쓰레기통이 꽉 차도록 기계처럼 커피타는 일을 해야했다. 과장이라는 직급을 달고 비서라는 직무로 일하고 있었지만 나의 주된 업무는 자칭 VIP라고 불리우고 싶은 나이 많은 아저씨들의 뒤치닥거리였다. 퇴사를 결심했다.
사무실을 벗어나니 나의 오후는 새로워졌다.
퇴사를 가장한 육아휴직이 시작된 후 나는 아이들과 평일 대낮의 데이트를 위해 다시 시간 설계를 했다. 아빠조차도 온 몸으로 거부하며 분리불안을 느끼는 딸 아이와의 애착형성이 시급했다.
까까 안 사준다고 삐진 빡이!
작은 아이는 아침에 일어나 눈을 뜨면 엄마가 집에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큰 아이는 엄마가 '회사를 끊어' (=회사를 그만둬서) 행복하다고 했다.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한 엄마라는 역할을 받아들이니 내 마음도 너그러워졌다. 특히 건강한 애착 형성이 필요한 작은 아이를 믿고 끊임없이 칭찬해주며 같은 시간에 일어나 밥 먹고 유치원 가는 생활을 꾸준히 이어나갔다. 그러면서도 나름 융통성을 발휘해 아이가 힘들어하면 유치원 등원을 쉬는 날도 있었고, 늦잠을 자면 깨우지 않고 일어날 때까지 편안하게 자도록 내버려뒀다.
직장인 때는 가질 수 없었던 여유로움을 가지고 아이들과 느긋한 시간을 보냈다. 등원할 때 "엄마 몇 시에 올까?"라고 물어보면 딸 아이는 자신이 하원하고 싶은 시간을 정해주기도 했다. 엄마인 나는 점심 먹고 난 후면 언제든 좋다고 했고 아이가 정해준 시간에 만나자고 하원을 약속했다. 그렇게 우린 해가 떠 있는 환한 대낮에 공원도 가고, 서점도 가고, 쇼핑몰도 갔다. 단 둘이 영화와 뮤지컬도 보고, 아이스크림을 사먹고, 마트에 장을 보러 갔다.
평일 오후의 여유를 즐기다. 세상은 넓고 갈 곳도, 할 일도 많다.
모든 에너지가 일에만 쏠려있던 때와는 완전 다른 일상이었다. 돈을 벌기 시작한 이후부터 나라는 인간이 평일 대낮에 회사 밖에 있을 수 있다는 상상을 해본 적이 없었다. 휴가를 쓰는 날에도 밀린 집안일을 하거나 몸이 아파 병원에 가기 위해 아이들을 유치원과 학교에 보냈다. 직장인이었던 나에게 유일한 광합성 시간은 서울의 어딘가에서 점심식사가 끝난 후 테이크 아웃 커피 한 잔을 손에 들고 회사로 복귀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해가 쨍한 환한 오후 전체를 아이들과 보내는 특별한 시간으로 만들 수 있다.
평일 오후엔 모든 것이 여유롭다. 놀이동산에서 몇 십분씩 줄을 서야 될 필요도 없고, 마음에 드는 식당에 예약없이 가서 원하는 자리에 앉으면 된다. 신비아파트 캐릭터와 악수할 수 있는 통로 자리를 예매하기 위해 뮤지컬 티켓 개봉일을 달력에 적을 필요도 없다. 차가 밀릴까 걱정할 필요없이 수도권 어디든 가도 되고, 주말이면 입구부터 북적북적한 병원 진료도 평일 대낮에 가면 순식간에 끝난다. 두 아이들과 마트에 가면 2~3시간 동안 구경하고, 만져보고, 먹어보며 재미지게 놀다 온다.
내 인생의 VIP들과 채우는 나의 오후 나의 평생 고객은 가족
이제 나는 내 인생의 VIP인 아이들과 잊지 못할 평일 오후를 위해 나의 시간을 투자한다. 수천억을 가지고 있어도 되돌릴 수 없는 아이들의 어린 시절, 이 모든 순간을 엄마와 함께 했던 기억들로 차곡차곡 쌓아두려 한다.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멋지게 전투하고 있는 남편의 역할에 감사하며 내 아이들을 사랑으로 감싸며 아끼고 올바르게 키우는 것에 온 힘을 다하겠다고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