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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윤의 해피레터 Oct 02. 2022

열여섯 번째 레터 : 받은 사랑을내가 돌려주는 방식

2022-09-25 발송 레터 


*이번 레터를 읽기 전에 이 글을 먼저 읽어주시면 더 좋습니다.^ㅇ^*


https://brunch.co.kr/@happyletter/21


(논술학원 선생님으로 일한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썼던 글, 어릴 때 만난 논술 선생님을 회고하는 글)




수업을 하다가 뭔가를 놓치거나 실수할 때가 있다. 자책할 때도 있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어간 적도 꽤 많았다. 왜냐하면 이 일을 아이들은 기억하지 못할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은 수업이 마치면, 줄줄이 잡혀 있는 다른 학원들을 가야 해서 부랴부랴 나가곤 한다. 빠르게 사라지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보며 이런 생각도 했다.


‘나는 수많은 선생님 중 한 명이고, 이 아이들은 미래에 내 이름과 나를 잊어버리겠지.’


왜 그렇게 생각했냐면 과거에 나를 너무 사랑해줬던 논술 선생님의 성함을 지금의 나는 완벽히 잊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그 선생님은 나를 어여쁘게 봐줘 ‘검정 머리 앤’이라는 내 마음에 쏙 드는 별명까지 붙여줬는데 말이다. 그런 사랑을 받았는데도 안타깝게도 나는 그분의 성함과 얼굴이 가물가물하다.


하지만 이런 내 생각을 깨버리는 햇살이들이 나타났다. 오늘은 이 햇살이들과 있었던 일을 적어보려고 한다.






1. 오래도록 내 이름을 기억할 것 같은 예감


어느 날 수업을 하다가 아이들이 내 이름을 물어봤다. 나는 아이들이 내 이름을 쉽게 기억했으면 해서 이런 삼행시를 지어 들려주었다.


처럼 둥근


가 반짝반짝


이 나요.


이런 삼행시를 고안하게 된 건, 많은 지인들이 내 이름을 ‘해’와 ‘혜’를 혼동해서였다. 나는 지인들에게 내 이름을 설명할 때 “혜’가 아니고 둥근 ‘해’가 떴습니다, 할 때 ‘해’야.”라고 말하곤 했었다. 삼행시로 내 이름을 설명해주니 아이들은 쉽게 내 이름을 외웠다.


한 햇살이는 자신이 선생님의 이름을 한 번에 외운 게 스스로 너무너무 자랑스러운 모양이었다. 삼행시로 내 이름을 알려준 뒤부터 아이는 나를 이렇게 부르기 시작했다.


“박처럼둥근해가반짝반짝윤이나는 박해윤 선생님!”


거짓말하지 않고, 아이는 저 긴 문장을 띄어쓰기 없이 한숨에 내뱉었다. 아이는 마치 노래하는 것처럼 나를 저렇게 불렀다. 선생님, 하고 부르면 될 걸 계속 저렇게 부르니 아이의 목이 아프지 않나 걱정이 될 정도였다. 나를 부르면서 햇살이의 신이 난 눈빛, 상기된 얼굴, 자신이 선생님 이름을 외웠다는 자부심 가득한 표정이 지금도 나에게 생생하다.


언제는 이런 날도 있었다. 나는 수업 전에 아이들에게 퀴즈를 내고, 맞힌 아이에게는 간식을 줘서 동기부여를 해줄 때가 있었다. 퀴즈는 당연히 수업에 관련된 내용으로만 냈다. 오늘도 퀴즈를 내려는데 햇살이가 손을 들고 나를 불렀다. 내가 가까이 가자 내 귀에 귓속말했다.


“선생님 오늘은 퀴즈를 ‘선생님 이름’으로 내요.”


그때 수업 구성원이, 내가 이름을 알려준 아이들이 아닌 아이들도 있었다. 그래서 ‘이거, 내 이름을 모르는 햇살이들에게는 반칙인데?’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나를 올려다보는 햇살이의 눈망울에는 ‘일주일이 지났는데도 선생님의 이름을 여전히 기억하는’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했다. 그런 햇살이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퀴즈로 ‘선생님의 이름은 무엇일까요?’라고 말을 하자마자 햇살이가 번쩍 손을 들었다. 어떤 햇살이는 ‘아! 나 아는데..!’하면서 내 이름을 기억하지 못해 아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박처럼둥근해가반짝반짝윤이나는 박해윤 선생님!”


햇살이는 내 이름을 그 누구보다 빠르게 외친 뒤 간식을 받게 되었다.


한동안 저렇게 부르고 말겠지, 생각했는데 며칠째 나를 ‘박처럼둥근해가반짝반짝윤이나는 박해윤 선생님’ 이라고 부르는 아이를 보며 이런 예감이 들었다.


‘이 햇살이.. 내 이름을 꽤 오래도록 기억할 것 같다..!’


아이들에게 어휘를 외우게 하는 방법은 맥락을 이용하는 거였다. 어휘를 설명해줄 때 그 뜻에 맞는 이야기나, 상황으로 설명해주면 아이들은 잘 까먹지 않았다. 그걸 보며 맥락의 힘을 믿었는데, 이 아이도 이야기로 외운 내 이름을 까먹을 것 같지 않았다. 그 생각을 하자 아이의 앞에서 하는 내 모든 행동에 책임감이 생겼다. 이름이 기억될 가치가 있는 선생님이 되어야겠다는 생각했다.


내 이름을 목이 터져라 불러준 햇살이는 최근에 학원을 그만두게 되었다. 안타깝게도, 내가 코로나에 걸려 햇살이의 마지막 수업을 함께하지 못했다. 비록 마지막 인사도 하지 못하고 헤어지게 되었지만 아이가 한동안은 내 이름을 기억해줄 걸 믿는다. 햇살이가 ‘박해윤 선생님’, 하고 나를 떠올릴 때 아이의 마음에 박처럼 둥근 해가 반짝반짝 차오르기를 바라고 있다.




2. 그 별명이 마음에 들었구나


어릴 적 논술 선생님께서 나에게 ‘검정 머리 앤’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듯이, 나도 한 햇살이의 별명을 만들어 주었다. 바로 ‘헤르미온느’


우리 학원에서는 자신 학년보다 높은 레벨의 책을 읽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런데 헤르미온느 햇살이는 자신의 학년보다 높은 레벨의 책을 읽는다. 신문 기사를 보며 어휘의 뜻을 찾거나 문제를 풀어야 하는 난이도 있는 활동도 어렵지 않게 해낸다. 영특한 친구다 보니 다른 친구가 나에게 질문한 걸 대신 대답해줄 때도 많았다. 약간의 핀잔을 주면서 말이다. 그런 모습이 내 눈에 헤르미온느와 겹쳐졌다.


헤르미온느 햇살이는 시사에 관심이 많아 나도 모르는 정보를 잘 알고 있어서 나를 놀라게 해줄 때가 많았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누구보다 뜨거운 관심을 보였고, 최근 뉴스들은 다 꿰고 있었다. 기후위기, 소외계층에 대한 문제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똑 부러지게 말할 줄 알았다. 선거 기간 동안에는 나에게 “돈 때문에 죽는 사람은 없는 세상이 되면 좋겠어요”라고 말해, 속으로 내가 ‘우리 햇살이가 정치해야 하는데..’라는 생각도 했다. 그러다 헤르미온느도 소설 속에서 집노예를 위한 해방 운동에 열정적이었던 게 생각이 났다. 그래서 단순히 햇살이가 영특해서가 아니라, 이런 부분까지 헤르미온느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헤르미온느 햇살이와 수업을 할 때, 아이와 씨름해야 했던 적도 많았다. 햇살이는 완벽주의자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햇살이는 자신이 쓰는 연필이 정해져 있었다. ‘그 연필’이 책상에 올려져 있지 않으면, 수업을 시작하지 않았다. 다른 반의 연필 통을 뒤져서라도 그 연필을 찾아왔다. 이런 성향이 강한 햇살이다보니 글을 쓰다가 자신의 마음에 안 들면 중간에 포기하는 일이 많았다.-내가 보기엔 충분히 잘 쓴 글이었는데 말이다- 결과물이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시 쳐다도 보지 않으려고 했다.


그게 반복되자 나는 단호한 태도를 취할 필요를 느꼈다. 그날 수업에서는, 나는 이미 시작한 글은 햇살이의 마음에 안 들더라도 끝까지 쓰게 했다. 햇살이는 기분이 상해서 궁시렁 궁시렁 거리면서 글을 썼다. 그런 와중에 나는 햇살이에게 전부터 생각했던 ‘헤르미온느’라는 별명을 알려주고 싶어졌다. 햇살이의 기분이 풀렸을 거라 생각되었을 때쯤, 옆에 다가가 슬며시 물어보았다.


“햇살아, 혹시 너 헤르미온느 아니?”


1초 만에 차가운 대답이 날아왔다.


“아니요.”


여전히 나에게 심통이 난 목소리였다. 기분이 아직 풀리진 않았구나.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꿋꿋이 말을 걸었다.


“모른다니까 아쉽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찾아봐도 좋을 것 같아! 아주 멋진 캐릭터거든. 사실 선생님은 햇살이가 헤르미온느하고 너무 닮았다고 생각했어.”


그러자 더더욱 차가운 대답이 날아왔다.


“그게 지금 수업이랑 무슨 상관인데요.”


햇살이의 눈높이에 맞춰 무릎을 낮추고 있었던 나는 머쓱해져 자리에서 일어섰다. 옆자리 친구가 햇살이에게 ‘야, 너 선생님한테 너무 철벽이다.’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햇살이가 지금은 기분이 상한 상태고 ‘헤르미온느’라는 캐릭터를 모르니 저런 반응이겠구나 생각을 했다. 어쩔 수 없나, 하고 넘어간 뒤 다음 수업 시간이 찾아왔다.


그날도 햇살이는 아주 똑 부러지게 자신의 해야 할 일을 척척 해냈다. 그걸 보니 칭찬이 안 나올 수가 없었다.


“햇살이는 정말 헤르미온느가 생각나는구나! 역시 선생님이 인정한 헤르미온느야.”


그러자 다른 친구가 나에게 ‘헤르미온느’가 뭐예요? 라고 물었다. 설명해주려고 입을 열 때쯤 햇살이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하기 시작했다.


“해리포터에 나오는 주연이야. 주인공 팀에서 브레인을 맡고 있어. 타임 터너를 이용해서 수업을 동시에 두 개씩 듣기도 해. 나중에 볼드모트를 물리치고 마법부 장관이 되는 캐릭터야.”


햇살이가 이렇게 쏟아내듯이 말한 뒤 무척 자랑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헤르미온느 캐릭터 소개를 완벽히 끝낸 햇살이를 보면서, 나는 잠시 멍해졌다. 아마 추측하기로는, 원래는 햇살이가 헤르미온느 캐릭터를 알고 있었는데 그날 수업에는 기분이 나빠서 모른다고 대답했거나 아니면 정말 모르는 캐릭터였는데, 선생님의 말을 듣고 그 캐릭터가 궁금해져 따로 찾아봤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실이 무엇이든, 아무튼 확실한 것 하나는 알 수 있었다.


‘헤르미온느라는 별명이 정말 마음에 들었구나......’


그런 햇살이의 모습을 보면서 나도 기분이 좋았다. 집에 가는 길에 나의 논술 선생님이 저절로 떠올랐다. 선생님께서 나의 성향을 완벽하게 알고 지어주신 별명인 ‘검정 머리 앤’. 그 별명은 나에게 두고두고 큰 힘이 되었다. 덜렁거리는 내가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할 때, 빨간 머리 앤도 그랬잖아 하면서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작가라는 꿈을 꿀 때 빨간 머리 앤도 결국 작가가 된 걸 생각하며 자극을 받았다.


햇살이도 분명 자신의 타고난 성향으로 좌절하는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는 날도 있을 거다. ‘나는 왜 이러지?’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내가 지어준 별명인 ‘헤르미온느’가 햇살이에게 힘이 되기를 바랐다. 완벽해 보이는 캐릭터인 헤르미온느도 잘 살펴보면 실수도 하고 미숙한 행동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녀가 친구들을 통해 성장해 나갔고, 자신의 지혜를 약자와 연대하는 일에 썼다는 것이 미래의 햇살이를 고무시키기를.




너무나 사랑스러운 아이들을 만나며 행복하기도 하지만, 수업이 많은 날은 힘에 부치는 것도 사실이다. 다른 선생님들이 계속해서 일을 그만두시면서 내 교실에만 수업이 몰리는 날도 있었다. 다른 선생님은 한 타임에 2-3명을 맡는데, 내 교실만 5-6명 타임인 날이 있었다.


나는 몇몇 아이는 다른 교실에 보내야 할까 고민하게 되었다. 나와 수업한 아이들을 다른 교실로 보내는 게 마음에 걸리긴 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어차피 나를 잊고 다른 선생님과도 잘 지내겠지’라는 안일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마법처럼 한 학부모님이 이렇게 연락을 주셨다.



이걸 보고 깜짝 놀란 건, 이 햇살이는 평소 수업 때 과묵함을 유지하는 아이였다. 나에게 한 번도 낯간지러운 표현을 한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다른 교실에 보내도 무난하게 잘 적응하겠다고 생각한 아이였다. 그런데 그 햇살이가 어머님께는 이렇게 말했다니. 그러고 보면 나도 어릴 때 좋아하는 선생님이 있는 학원으로 가는 발걸음은 가벼웠던 기억이 났다. 어떤 과목의 선생님이었는지는 기억조차 나지 않지만, 아무튼 즐겁게 학원에 간 감정은 떠올랐다.


그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미래엔 당연히 이 아이들이 나를 잊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튼 지금 나를 만나는 아이들은 지금 가장 최선의 나이로 온 아이들이 아닌가. 미래가 어떻든, 아무튼 현재를 살고 있는 아이들은 지금 나의 이름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데. 지금 이 아이의 세상에 내가 포함되어있는데.


아이들을 통해 어릴 때의 내 모습을 볼 때가 있다. 특히 하기 싫어서 버티고, 까불거리고, 끊임없이 다른 말을 하는 아이들을 보며, 과거의 나를 떠올린다. 나를 스쳐 지나간 수많은 학원 선생님들이 ‘나를 가르치기 힘드셨겠구나..!’하며 반성 모드로 들어간다. 어릴 때의 나는 눈치 없고, 하고 싶은 말은 꼭 해야 하는 말괄량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존재 자체를 용인해주고 사랑으로 대해준 분들이 둥글게 둥글게, 지금의 나를 빚어주었겠구나 싶다. 그래서 이제는 안다. 내가 어떤 사랑을 받았는지는 다 기억하지는 못해도, 그 사랑으로 지금의 내가 만들어졌을 것을. 그리고 그런 사랑을 받았기에 지금의 아이들에게 사랑을 돌려줄 수 있다는 게 참 다행이라는 것도.


자신의 세상에 기꺼이 나를 포함해준 귀한 우리 햇살이들.


지금의 나를 어여쁘게 봐주는 아이들을 나는 최선을 다해 사랑할 것이다.

언젠가 나를 기억하지 못해도 괜찮다. 현재 사랑을 나눌 때 ‘지금’의 우리가 그걸 생생히 기억할 테니까.


나중에 햇살이들이 다정한 어른들이 될 때, 그 다정함에 내가 한 줄기 보탬이 된다면 그걸로 충분할 것이다.


햇살이들이 선물해 준 그림들



Q.

나를 사랑해준 기억에 남는 어른은 누구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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