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인사발령, 무슨 의미였을까

의미를 말하지 않기로 배운 사람들

by 공재


“그 인사발령, 선생님께는 어떤 의미였어요?”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분은 잠깐 나를 보더니 무슨 그런 걸 묻냐는 표정으로 말했다.


“의미요? 의미가 어딨어요. 그냥 조직에서 시키면 하는 거죠.”


그 순간,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몇 년간 적응하며 잘 지내던 부서에서 갑작스럽게,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낯선 업무와 새로운 팀의 분위기에 대한 불안을 한참이나 이야기하신 직후였다. 그런데 막상 그 인사발령은 자신에게 아무 의미도 없다고 했다. 좋다, 싫다, 속상하다, 화가 났다, 짜증이 난다 같은 단순한 감정조차 잘 모르겠다고 했다.




그 말은 감정이 없는 말이 아니었다. 감정을 오래 눌러온 사람의 말이었다. ‘살아 있으니까 산다’라는 말이 떠올랐다. 의미가 없다는 말에는 정말 아무 의미도 없다는 뜻이 아니라, 의미를 묻지 않기로 한 선택이 담겨 있는 경우가 많다. 이유를 찾는 순간 흔들릴 것 같아서, 감정을 들여다보는 순간 감당해야 할 것들이 생길까 봐, 차라리 아무 의미도 없다고 말하는 쪽을 택해온 시간들. 그렇게 의미를 비워두는 일은 무감해지는 일이 아니라, 버티기 위한 하나의 방식이었다.


버티는 삶에는 종종 비슷한 말들이 붙는다. “어쩔 수 없잖아요.” “다들 그렇게 살아요.” “그냥 해야 하니까 하는 거죠.” 그 말들 속에 많은 감정이 생략되어 있다는 것이 옆에 있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더 선명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그날, 그 말은 오히려 더 크게 들렸다. 알아채지 못한 채 눌러두었거나, 의식 위로 올라왔다가도 다시 밀어 넣어졌을 감정들이 있다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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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수십 년 전, 입학하자마자 처음 받은 사회책 첫 페이지에 적혀 있던 문장이 떠올랐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다.’ 왜 그 문장이 떠올랐을까. 혼자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은 관계 안에 머무르려 애쓰고, 사람들과 잘 지내는 방법을 배우고 연구한다. 그리고 그분의 세대는 어떤 감정을 말하면 관계가 흔들리고, 어떤 말은 문제를 만든다는 것을 경험으로 익혔다. 때로는 혼나가며 참는 것과 누르는 것을 먼저 배웠다. 그래서 남들 앞에서는 잘 지내는 척,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일이 더 익숙해졌을 뿐이다.




하지만 같은 부모 밑에서 자라고, 비슷한 환경을 겪고, 유전자가 거의 일치한다는 쌍둥이조차도 각자의 경험에는 각자의 해석이 붙는다. ‘다들 그렇게 산다’고 해도 같은 상황이 누군가에게는 불편하고, 누군가에게는 짜증이 나며, 누군가에게는 서글픈 반면, 누군가에게는 아무 일도 아닐 수 있다. 같은 사건이라도 그것을 느끼는 강도와 표현하는 방식은 각자가 살아온 성향과 경험에 따라 달라진다. 그리고 어떤 일을 겪었는지보다, 그 경험을 통과하는 내가 어떤 느낌이 들었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를 의식하며 살아가는지 아닌지가 삶을 다르게 만든다는 생각이 든다.


남들은 다 잘 지내는 것 같은데 나만 유난히 힘든 것처럼 느껴지고, 조금이라도 불편한 티가 밖으로 새어나가면 약해 보일까 봐, 참을성이 부족해 보일까 봐 더 입을 다물게 된다. ‘남들이 뭐라는 게 뭐가 중요하냐’는 말은 쉽지만, 의미를 묻지 않는 방식에 익숙해진 세대에게도, 표현이 자유로워 보이는 요즘의 아이들에게도 남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연스럽기는 쉽지 않다.




오랜 시간 배움으로, 경험으로, 몸으로 축적된 방식이 하루아침에 바뀌지는 않는다. 사람들과 잘 지내기 위해, 약해 보이지 않기 위해 불편함을 드러내지 않는 선택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남들에게 티를 내지 않더라도, 적어도 나는 나를 알아줄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애쓰고 있다는 것, 내가 힘들다는 것. 그렇게 마음을 조금 더 잘게 나누어 이름을 붙여보면, 느껴지는 것도 달라진다. 화가 났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외로움이었고, 짜증이 나서 퉁명스러웠던 게 아니라 미안해서, 섭섭해서였다는 걸 나만이라도 알고 지나갈 수는 없을까.


그날 내가 던진 질문은 그분을 흔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어쩌면 나 자신에게 먼저 묻는 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의미를 말해달라는 부탁이 아니라, 당신이 어떤 상태로 이 시간을 통과하고 있는지, 그걸 함께 알아보고 싶다는 마음에서 나온 질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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