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도를 낮추어 10km를 힘들이지 않고 달릴 수 있게 되자, 달리기 생활에도 평온함이 찾아왔다. 운동을 하고 나서도 힘든 것이 아니라, 좀 더 달려도 되겠는데, 아쉽지만 오늘은 이쯤에서 그만하자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여름으로 접어 들어 날씨가 점점 더워지고 있어서, 아침 운동을 위해서는 조금씩 더 일찍 일어나야 하는 점이 유일한 단점일 정도였다. 그런데 내일도 오늘처럼 달리기를 하는 것도 좋지만, 뭔가 방향성을 잡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마음 속에 뭔가 꿈틀대는 것이 느껴지는 날들이 많아졌다. 바로 달리는 거리를 더 늘여서 하프 마라톤에 도전해보고 싶다는 것이다.
하프 마라톤을 달린다는 것은 달리기를 처음 시작할 때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5km를 쉬지 않고 달리는 것에 2년 2개월이 걸렸던 점을 생각하면, 10km를 뛸 수 있는 현재 정도면 너무나도 만족이다는 생각은 이미 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난 번 대회에서 하프 마라톤 주자들을 보고 나니, 혹시 나도 한 번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우선 하프 마라톤이 어느 정도의 거리인지 감을 잡기 위해 지도앱을 켜보았다. 우리집에서 왕복으로 하프 마라톤 거리가 되는 곳을 찾아보니, 집에서 출발해서 양재천이 끝나 탄천과 만나는 곳 근처까지 간 다음 돌아와야 되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이들과 그곳 근처까지 자전거를 타고가서 편의점 즉석라면을 먹은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왕복 3시간 정도는 걸렸던 기억이 나면서, 못할 일이라 지레 짐작을 했다. 그런데 5km를 달릴 수 있던 정도에서 매달 1km씩 거리를 늘렸더니 어느 순간 10km를 달리게 되었던 지난 날의 기억이 스쳐 지나가면서, 하프 마라톤도 이렇게 준비하면 언젠가는 해볼 만 하겠다는 생각이 마음 한편에 자리잡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내 결정은 보통 처음 마음 먹은 대로 하는 것이었다. 할까 말까 고민일 때는 일단 해보는 것이 나중에 후회가 적다는 점은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해서 후회가 되면 좋은 경험을 한 것으로 생각하면 되지만, 안 했는데 한참 뒤에 아쉬운 마음이 생기면 그 때는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때를 놓쳐버린 것이 되는 것이었다. 이런 원칙에 따라서 판단한 결과, 이번에는 해 보는 것으로 결정을 내렸다. 더구나 하프 마라톤을 도전한다고 해서 크게 손해보는 것도 없는 것 같았다. 연습에 시간을 좀 더 쏟아야 한다는 것 정도인데, 연습 시간은 내가 다른 일을 조절해서 달리기에 할애하는 시간을 추가로 만들면 되는 것이었다. 내년 5월쯤에 과천마라톤이 있을테니, 그 때의 과천마라톤을 하프마라톤 데뷔 무대로 정했다. 무려 열 달 뒤의 일이니 천천히 준비하면 되겠다 싶었다.
대략적인 훈련계획은 이랬다. 주중에 10km 넘게 뛰는 것은 내 체력상 무리였다. 그래서 주중 두 번은 지금과 같이 10km를 달리고, 주말에 하는 한 번의 달리기 때의 거리를 점차로 늘리는 것이었다. 이번 한 달간 주말 달리기는 11km, 그 다음 달의 주말 달리기는 12km 이런 식으로 말이다.
10km에서 11km로 거리를 늘리는 것이 무리는 아니었다. 운동거리는 10% 늘어나는 정도여서 감당할 만했고, 좀 익숙해지니 한 달에 2km씩 늘려도 되겠다는 자신감이 생길 정도이기도 했다. 문제는 다른 곳에서 있었는데, 바로 더위와 햇살이 나를 힘들게 했던 것이다. 작년 여름까지 뛰었던 것은 최장 거리가 5km 정도되고, 시간도 30~40분 남짓 정도의 시간이었기에, 운동하는 동안 덥기는 했지만 참을 만한 정도였다. 더구나 그 때는 달리는 시간도 밤 늦은 시간이라서, 비록 후덥지근한 여름 밤 중이기는 했지만, 햇빛 아래에서 달리지는 않았던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얼마 전부터 아침 달리기로 시간을 바꾸는 과정에서 처음 접하게 된 여름 달리기의 어려움을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다. 일단 여름철에는 해가 너무나도 빨리 떴다. 보통 아침 6시에 달리기를 시작하는데, 7월의 아침 6시는 이미 해가 뜬지 한참이나 지난 시간이었다. 달리기를 시작하자 말자 뜨거운 햇살 아래 놓였고, 운동을 마칠 때인 7시에는 잡아먹을 듯한 더위로 태양을 차마 쳐다보기가 어려울 정도이기도 했다. 여기에 운동으로 인한 열기까지 더해지니 몸은 땀범벅이 되기 일수였다.
여름철에 어려운 점은 더위만은 아니었다. 여름에는 장마와 홍수도 있었던 것이다. 잊을만하면 태풍이 찾아왔고, 집중호우로 인해 달리기 장소인 양재천이 침수되어 통제되는 날도 많았다. 하루 이틀 정도면 모르겠지만, 꼭 내가 달릴 수 있는 여유시간이 있을 때만 내리는 비가 야속하기도 했다. 잠깐 비가 그친 틈을 타서, 이 때다 싶은 생각에 달리러 갔다가 갑작스런 날씨 변화에 비를 흠뻑 맞고 돌아온 일도 있었다. 아무리 여름이라고 해도 쏟아지는 비를 계속 맞으며 달리다가 감기에 걸릴 뻔하기도 했다. 덥고 날씨도 안 좋은데, 여름에는 헬스장을 등록해서 러닝머신 위에서 뛰면 안되냐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지금이야 그렇게 할 정도의 융통성은 있지만, 그 때만 해도 로드러닝이 아니면 달리기가 아니라는 로드러닝에 대한 괜한 자부심이 있기도 했었다.
날씨 핑계를 계속 대고 있으니, 그럼 날씨가 좋은 때에는 열심히 운동을 했는지가 궁금할 것이다. 결과부터 말하면, 내 자신이 의지로 가득 차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알람소리를 듣고서도 10분만 더 자야지 하다가 못 일어난 날도 있었고, 내일 아침에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를 보면서 기뻐하기도 했었다. 예정된 달리기를 몸이 찌뿌둥하다는 핑계로 빼먹었던 날도 많았다.
그래도 어떻게든 꾸역꾸역 매달 1km씩 거리를 늘려서 달리기는 했다. 그러다 보니 늦가을에는 어느덧 15km를 달릴 정도가 되었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날씨에 달리기를 하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과천마라톤 외에 다른 마라톤 대회를 알지는 못했지만, 토요일 아침에 혼자서 긴 거리를 달리고 오면 기분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물론 힘들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원래 낮잠을 안 자는데, 처음 15km를 달리고 온 날은 너무 피곤한 나머지 곤히 낮잠을 잘 정도이기는 했다. 그래도 그렇게 계속해서 달리다 보니, 일부러 빨리 뛰려고 할 것도 아니었지만 조금씩 속도도 올라갔고, 신기하게도 심박수는 이전보다 떨어졌다. 가끔씩은 심박, 호흡, 케이던스의 3박자가 잘 맞아떨어지는 때가 있기도 했다. 마치 컨베이어 벨트에 올라탄 것처럼, 의도하지 않아도 발이 알아서 굴러가고 알아서 호흡하고 더구나 힘들지도 않으며 심박이 낮게 유지되는 것이 바로 그런 때였다. 어쩌다가 찾아오는 순간이어서, 그 뒤로 일부러 해보려고 해도 재연이 잘 안 되었지만, 뛰다 보면 간혹 한 번 씩 찾아오는 황홀한 순간이었다.
좀 더 시간이 지나자 들이쉬는 숨이 점점 차갑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겨울이 가까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계절의 변화는 러너 수의 변화로도 확인이 가능했다. 날씨가 추워지자 주로에서 뛰는 사람은 점점 줄어들었다. 간간이 보이던 초보인 듯한 사람들은 겨울이 오면서 모두 사라졌고, 이제는 늘 보던 몇몇의 사람들만 보인다. 이 때다 싶어서 작년에 사 두었던 데카트론 동계 운동복을 꺼냈다. 긴바지가 없어서 달리기를 그만 두었던 몇 해 전을 기억하며 피식 웃음이 났다. 영하 5도까지는 큰 고민 없이 달리기를 했고, 영하 10도까지도 복장만 좀 더 갖추면 추위를 핑계로 뛰지 못하는 경우는 없었다. 땀이 줄줄 흘러내리는 한여름의 달리기보다는, 춥지만 고요하게 달릴 수 있는 겨울철 달리기가 낫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람에 따라 여름 달리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겨울 달리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아무래도 여름에는 복장이 가볍고, 뛰고 나서 찬물 샤워를 할 때의 짜릿함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여름 달리기 옹호론자의 얘기다. 그렇지만 더위로 쉽게 지치기에, 더위를 피하려면 아침 일찍 일어나거나 밤늦게 운동을 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기는 하다. 반대로 겨울에는 이것저것 껴입어야 해서 몸도 무겁고, 준비에 시간도 많이 걸린다. 따뜻한 이불을 박차고 깜깜한 새벽에 일어나기도 어렵거니와, 준비를 마치고 아파트 현관을 나갔을 때 쌩하고 부는 바람을 만나면 사서 고생을 왜 하는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도 조금만 뛰면 땀이 살짝 나면서 추위는 곧 잊게 되고, 아무도 없는 한적한 주로를 달리는 낭만이 있기도 하다. 장단점이 분명하지만, 굳이 편을 나누자면, 나에게는 겨울 달기기가 좀 더 매력적인 것 같다.
그해 겨울은 춥고 눈이 많이 왔다. 온 세상을 하얗게 덮는 눈은 낭만적이기는 했지만, 러너에게는 겨울 운동의 장애물이었다. 눈이 온 뒤로 추운 날씨가 계속되면서 내린 눈이 얼어버렸고, 아무리 제설을 잘 한다고 해도 군데군데 미끄러운 구간이 있을 수 밖에는 없었다. 날씨를 핑계로, 내 의지가 부족했던 것을 핑계로, 그해 겨울 주말 운동은 계획했던 것의 절반도 하지 못했었다. 해를 넘겨 달력은 2024년 2월을 가리키고 있는데, 아직 나의 최장거리는 18km에 머물러 있었다. 뛰어본 최장 거리가 이 정도이면 하프마라톤을 완주할 수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얘기라고는 하는데, 스스로는 조바심이 났다. 연습 때 뛰어보지 않은 거리를 실전에서 뛰는 것은 다소 무모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악으로 깡으로, 뛰어보지 않은 나머지 3km를 뛸 수는 있을 것 같았지만, 그래도 연습할 때 하프마라톤 거리를 미리 뛰고나면, 이미 뛰어본 거리감에 실전에서 안도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대회까지는 아직 두 달 넘게 남아 있었다. 3월에 19km, 4월에 20km를 뛰고, 마침내 5월 대회 전에 21km를 뛰면 하프마라톤 거리를 완주할 수 있다는 계산을 했다. 다행히도 계획은 지켜졌고, 마침내 5월이 되어 첫 하프마라톤 대회를 앞두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