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띠띠띠띠” 가민시계의 알람소리와 함께 눈을 떴다. 난생 처음 참가하는 하프마라톤 대회의 아침이 밝은 것이다. Garmin 시계를 구입한 이후 샤워할 때의 잠시동안을 제외하고는 24시간 시계를 차고 다니고 있다. 처음에는 시계를 차고 다니는 것이 어색했는데,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금새 익숙해졌고, 어느 날부터는 손목에 시계가 없으면 찾을 정도가 되었다. 며칠 전부터는 알람시계도 핸드폰 대신 Garmin이 담당하게 되었다. 핸드폰을 침대 옆에 두게 되면 잠결에 잠깐 깨었을 때도 핸드폰을 확인하다가 다시 잠이 들지 못하는 때도 있었는데 시계는 시간만 확인을 하면 되니, 핸드폰 대신 시계를 알람으로 사용하는 것이 숙면에 도움이 되는 것 같았다.
아침으로는 어제 사온 식빵 두 조각에 잼을 발라서 물과 함께 먹었다. 시합이 아닌 아침 운동 때는 일어나자마자 물 한 모금 마시고 공복 상태로 뛰는 것이 보통인데, 그래도 15km 이상의 거리를 뛰고 나면 배가 고프기는 했다. 그런데 대회는 8시에 시작이고, 그 때까지 아무 것도 먹지 않았다가는 대회 중에 지칠 것이 뻔하기에 조금이나마 아침을 먹기로 한 것이다. 날씨앱에서는 5월인 오늘의 최고 기온을 20도 중반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창문을 열자마자 집 안으로 들어오는 바람은 적당한 온기를 느낄 수 있을 정도여서, 대회 시간에는 날씨가 꽤 덥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제 저녁에 미리 꺼내 놓았던 운동복에 대회용 번호표를 달았다. 번호표가 붙은 운동복을 입은 내 모습을 보니 국가대표 선수가 되기라도 한 것처럼 뿌듯한 느낌이 들었다. 가족들을 깨울세라 조용히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출발지는 집에서부터 걸어서 15분 정도 걸리는, 작년과 같은 동네 체육공원이었다. 이곳에서 5km 대회를 처음 나간 것이 얼마 전인 것 같은데, 10km 대회에 이어서 오늘은 하프 대회까지 나가게 되니 뭔가 나아지고 있다는 생각에 스스로가 대견해보였다. 힘을 비축해두어야 완주할 수 있다는 생각에 출발지까지 천천히 걸어가기로 했다. 아파트 정문을 나서서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으니, 아직 잠이 덜 깬 아이들을 데리고 운동복 차림으로 나온 젊은 가족이 보였다. 5km에는 가족 단위로도 많이 참가를 하는데, 오늘 아이들까지 모두 안전하게 완주하고 맛있는 것 드시기를 빌었다. 다음 대회에는 우리 가족도 5km에 함께 나가자고 얘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대회장이 가까워질수록 점점 많은 사람들이 합류를 했고, 심지어 지하철 출구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기도 했다. 동네사람들만 오는 것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멀리서 이 아침에 지하철을 타고 오다니, 그 분들의 열정에 마음 속으로 박수를 보냈다.
마침내 도착한 대회장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평소의 조용했던 주말 아침 풍경과는 달리 그곳은 러너들의 흥분과 긴장, 그리고 완주에 대한 희망이 가득 찬, 평소와는 다른 모습의 공간으로 재탄생한 것이었다. 여러 명이서 서로의 목표기록을 얘기하는 사람들을 보니, 혼자인 나는 약간의 외로움이 있기는 했지만, 신발끈을 동여 매는 것으로 마음을 다 잡았다. 처음 출전하는 하프 대회의 완주를 위해서는 체력을 아껴야 한다는 생각에 준비운동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관중석에 앉아서 사람들을 구경했다. 출발 전에 쉬는 것보다는 길지 않은 구간을 그러나 빠르게 뛰어서 심박을 올려 놓으면 대회 중에 달릴 때 도움이 된다는 것은 그로부터 2년이나 지난 손기정 마라톤 대회에서 체감을 하게 되었지만, 그 때는 이런 것을 모를 때였다.
가만히 앉아서 구경을 하다 보니 새롭게 알게 된 것도 하나 있었다. 바로 참가자들이 출발 전에 하나같이 뭔가를 짜 먹는 것이었다. 생긴 것은 짜요짜요와 같이 비닐로 된 포장을 한 것인데, 크기는 믹스커피를 옆으로 두 개 정도 붙여 놓은 정도였다. 색깔은 빨간색인 것이 많았는데, 검정색인 것도 있고, 은색인 것도 있는 등 다양하기는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탄수화물을 농축한 성분으로 된 에너지젤이었다. 달릴 때 몸에 저당된 탄수화물 만으로 에너지를 내기에는 한계가 있어서, 적당한 간격으로 에너지를 외부에서 보충해주는 것이라고 했다. 하프 주자라면 에너지젤을 한 두개는 가지고 가는 것이 보통이라고도 하는데, 나는 그런 것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21km를 달린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준비가 없는 상태로 첫 하프 대회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준비성이 있는 것 같으면서도 어떨 때는 허당이라는 생각에 사람 안 달라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프 주자들의 면면을 보니 역시나 프로 러너의 냄새가 물씬 풍겼다. 뭔가 화려해보이는 최신 러닝화, 경기용 짧은 반바지, 부끄러워서 나는 입지 못하는 민소매 상의, 눈이 보이지 않는 반사형의 렌즈로 된 썬글라스, 근육을 잡아줘서 통증을 줄여주는 다리 테이핑, 그리고 결정적으로 한두개씩은 가지고 있는 에너지젤. 이 중에 제대로 갖춘 것은 없었지만, 얼마 전 생일에 아내가 선물로 사준 신상품 호카 클리프톤 신발을 신었음을 위안으로 삼았다. 이들처럼 뭔가 준비를 해서 뛰려면 아직도 갈 길이 멀구나 싶었지만, 연습으로 하프 코스를 달린 적 있으니 어떻게든 완주는 할 수 있겠지라는 기대가 있기는 했다. 여기는 내가 매번 뛰는 코스가 아닌가. 코스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평소 연습한 것처럼 하자고 다짐을 하면 출발라인에 섰다. 풀코스 경주는 없는 대회이기에, 나를 포함한 하프코스 주자가 가장 먼저 스타팅 라인에 섰다.
기록이 목표가 아니라 완주를 노리는 내가 출발선과 가까운 앞쪽에 있을 이유는 없어서 뒷쪽으로 자리를 잡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입담 좋은 진행자 분의 화이팅 외침과 함께 드디어 경기가 시작되었다. 출발선 근처에 있던 사람들은 총알처럼 달려갔지만, 나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빠져 나가는 것을 보며 다소 천천히 출발을 했다.
대회 분위기에 휩쓸려 오버페이스를 하면 안 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하며, 초반 1~2km는 7분 페이스로 달리면서 컨디션을 점검해보기로 했다. 이때 심박이 높게 올라가버리면 그 날 달리기가 쉽지 않다는 것은 그 동안의 경험을 통해 충분히 알고 있었다. 다행히도 2km를 달릴 때까지 7분 페이스를 유지하고 있는대도 심박은 존3를 넘어가지 않았다. 5월의 햇살이 다소 뜨겁기는 했지만, 더위가 완주의 장애물은 아닐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천천히 뛰었던 것 때문인지 나를 추월해 가는 사람이 초반부터 계속 있었다. 한참을 그러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니 내가 하프 주자의 거의 뒷부분에서 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프 첫 대회이기는 하지만, 조금만 속도를 내보기로 했다. 4km가 되자 속도는 6분 페이스가 되었고, 그 사이 내가 다른 사람들을 추월해가기도 했다.
이 지점에서 귀인을 만났다. 나보다 조금 앞에서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면서 뛰어 가고 있는 젊은 남자 러너가 바로 그 분이다. 100~200미터를 뒤에서 따라가며 뛰었는데 나와는 계속해서 같은 간격이 유지되었기에 앞으로도 따라서 뛰어가면 되겠다는 생각을 하며, 이 분을 나의 오늘 페이스 메이커로 정했다. 뛰면서 시계를 계속 확인해보니 다행히도 이 분은 6분 페이스를 정확히 유지하며 달렸기에, 페이스 메이커만 따라가면 완주에 성공하겠다는 희망이 보였다. 5km 지점이 되자, 10km 참가자와 하프 참가자의 코스가 나뉘어졌다. 10km 참가자는 반환점을 돌아 출발지로 돌아가는데, 하프 참가자는 계속해서 직진으로 달리는 것이었다. 작년 10km 대회에서는 나도 여기에서 반환을 했었는데, 오늘은 이를 넘어서서 달린다는 생각에 순간 그 동안 성장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라톤은 정직한 운동이다. 기본적인 체력에 따라 처음 달리기를 시작할 때의 기록은 각자 다르겠지만, 그 이후의 결과를 가르는 것은 기존의 체력, 경험이 아니라 반복적인 훈련의 유무에 달릴 건 같다. 체력 좋은 축구선수라 하더라도 연습하지 않으면 하프 완주는 어려울 수 있고, 반대로 나처럼 운동과는 담을 쌓은 사람도 계속해서 노력하면 하프 마라톤 완주가 가능할 것이다. 그 동안의 훈련이 헛되지 않을 것이라고 믿어 보며, 10km를 알리는 다음 이정표가 나올 때까지 페이스 메이커와의 동행은 계속되었다. 좀 떨어진 거리에서 내가 따라갔기에 그 분은 나의 존재를 잘 몰랐겠지만, 그 분이 급수대에서 물을 마실 때 나도 물을 마시고, 그 분이 얼마 없는 그늘 쪽으로 뛰면 나도 그 쪽으로 뛰는 등 즐거운 동행이 계속되었다. 그런데 10km에서 그 분과의 이별을 하고 말았다. 10km가 지나자 그 분이 갑자기 속도를 올렸다. 간격이 벌어지는 것을 느끼며 원래대로의 간격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190을 향해 달려가는 내 심박을 보고는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이별을 고했다. 제가 누구인지 당신은 모르시겠지만, 그 동안 감사했습니다. 덕분에 10km까지 잘 왔습니다. 나머지 11km는 제 힘으로 어떻게든 헤쳐나가 보겠습니다고 마음 속의 인사를 건넸다.
이 때부터 좌충우돌이 시작되었다. 비록 연습으로 하프 거리를 뛰어본 적은 있지만, 천천히 630~700의 페이스로 달린 것이기에 600의 페이스로 달리는 것은 다소 버거웠다. 그래도 힘을 내보기로 했다.
조금 지나 하프코스의 반환점에 도착했다. 한참 전부터 존5로 올라간 심박은 떨어질 줄을 몰랐고, 이제부터는 그만 걸어가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지만, 곧 이어 등장한 급수대에서 물 한 잔을 마시며 여기에서 포기할 수 없다고 마음을 다 잡았다. 이후 나만의 새로운 페이스메이커를 찾기 위해 이리저리 노력했던 것도 모두 허사로 돌아갔다. 대회는 중반부를 지나 마지막으로 치닫고 있었고, 지금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나처럼 지금의 속도로 달리는 것이 버거운 상황에 있었던 것이다. 저 앞에서 누군가가 에너지젤을 먹고 있다. 나도 저거 하나만 있었으면... 불로장생의 약물을 가지고 있는 듯한 그 러너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머리 위로는 점점 하늘 높이 떠오르는 해가 있었고, 눈 앞으로는 그늘 한 점 없는 주로가 계속 펼쳐졌다. 반대편에서는 뒤늦게 출발한 10km 도전자들이 오고 있었다. 누가 나를 알아볼리도 없겠지만, 그래도 힘이 들지 않은 척, 의연한 척 하면서 달려갔다. 그러나 이런 순간은 잠시, 다리가 점점 묵직해지고, 가빨라진 호흡은 진정되지 않았다. 두발자국 가서 들이쉬고, 두발자국 가서 내쉰다는 연습 때의 호흡법은 버려버린지 오래이고, 가삐 들이쉬고 내쉬어 간신히 생명줄을 유지하는 것에 만족할 수 밖에 없었다. 땀은 점점 흘러내려 상의가 땀범벅이 된 지는 한참 전이고, 모자를 타고 귀 밑을 지나 등으로 흘러내리는 땀이 느껴지는 지경이었다.
드디어 목적지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리는 굴다리가 보였다. 여기에서부터 집까지의 거리는 2km인데, 오늘은 이보다 훨씬 짧은 500m 가량만 달리면 바로 골인지점이니 마지막 힘을 내보기로 했다. 그 때였다. 저 앞에서 굴다리를 지나가는 러너들이 화이팅을 외쳤다. 화이팅을 외치면 힘이 날 것 같아서, 굴다리를 달리는 동안 나도 소리를 질렀다. 그 덕분인지 없던 기운이 얼마 동안은 생긴 것 같았다. 여기에서 조금만 더 가면 시원한 물과 간식이 기다리고 있으니 한 발자국씩 조금만 더... 골인지점인 체육공원 트랙에 진입하기 직전에는 짧지만 경사도가 있는 언덕이 있다. 마음 속으로 하나둘하나둘을 외치며 비롯 느리지만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발검음을 떼었다. 언덕을 올라서 좌측으로 돌고, 거기에서부터 200미터 정도만 달려가면 드디어 골인 지점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언덕 위에서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화이팅을 외치고 있었다. 대회에 나간 가족을 응원하는 사람들, 대회 관계자들, 그리고 어딘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같은 러닝크루원을 응원하는 사람들... 나와는 상관이 없지만, 그분들은 나에게도 화이팅을 외쳐주었다. 순간 저 깊은 곳에서 뭔가가 밀려들었다. 이런 것이 감동인가.. 서로 모르는 사이이지만, 달리기로 하나된 사람들이, 서로의 완주를 응원하며, 마침내 결과를 이뤄내는 모습. 승패를 가르는 것이 아닌 나 자신과의 싸움이지만, 그 곁을 누군가가 도와주고 있다는 사실에 순간 눈에서 물방울이 맻히는 것 같았다. 눈물이 아니라 더워서 땀이 한 방울 흘렀던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 1년 뒤에 경주 동아마라톤에서도 같은 경험을 했다. 멀리 경주까지, 그것도 1박 2일 일정으로 혼자서 난생 처음 원거리 대회 참가를 했다. 대회 초반부터 비가 내려서 주로에는 빗물이 군데군데 고여 있었고, 신발과 옷은 젖을 대로 젖은 상태로 한참을 달려 14~15km된 지점을 달리고 있을 때였다. 앞으로는 구불구불한 오르막길이 지친 러너들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오르막길이 시작되기 전 저 앞쪽의 모퉁이에서 누군가가 참가자의 이름을 한 명씩 부르고 있는 것이었다. 복장을 보면 러닝크루는 아닌 것으로 보여서, 가족이 대회에 참가했나 싶었는데, 그것도 아님을 가까이 다가가자 알게 되었다. 그 분은 참가자들의 배번에 붙은 이름을 보고 김철수 화이팅, 박미영 화이팅을 계속해서 불러주고 있는 천사같은 분이셨던 것이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내 이름이 잘 보이게 천사님이 계시는 가장자리로 달려보았다. 천사님은 이태태 화이팅이라고 내 이름도 불러주었다. 갑자기 몸에서 소름이 돋으며 세포 깊은 구석에 저장해 두었던 힘을 찾은 양 발걸음에 힘이 실렸다. 하얀 앞치마를 두르고, 머리에도 하얀 조리용 모자를 쓰고 계셨던, 교리김밥 본점의 아주머니 천사님. 제가 그 날은 너무 힘들어 찾아 뵙지 못했지만, 앞으로 저는 경주에 가게 되면 다른 김밥 집은 제끼고 교리김밥만 먹겠습니다. 그 때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드디어 트랙에 접어들었다. 100미터 쯤 앞 골인지점에 설치된 큰 전자시계에 표시된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가고 있었고, 나는 다시 한 번 마지막 힘을 내었다. 최고의 스피드를 위해 팔을 앞뒤로 크게 저으며, 보폭을 넓혔다. 10미터, 5미터, 드디어 골인.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터질 것 같은 심장을 부여잡으며 호흡을 가다듬는 것과 마실 물을 빨리 찾는 것 외에 생각나는 것은 없었다. 꿀껄꿀꺽 주최측에서 나눠주는 500미리 생수 한 병을 한모금에 마셨다. 그제서야 정신이 나면서 슬며시 미소가 번졌다. 드디어 해냈다. 하프코스 완주를 내가 해낸 것이다. 1시간 57분 48초. 엄청난 기록은 아니지만, 나의 첫 하프 완주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