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nna 정연주 Jan 04. 2018

노련함의 참신함, 그 변주에 대하여

  

아나운서로서 방송을 할 때,  스스로 만들어간 원칙이 있다. '연기'를 하지 않겠다는 것. 특히 라디오 진행을 하 '~척' 하지 않으려 했다. 실제로 모르는 것을 아는 척, 싫어하는 것을 좋아하는 척,  기쁜 것을 무덤덤한 척, 무덤덤한 것에 기쁜 척, 화난 것에 아무렇지 않은 척, 아무것도 아닌 것에 화난 척 하는 것을 잘 하지 못하는 설익은 성격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목소리만으로 청취자와 만나며, 마음을 담지 못한 채 꾸며진 '발화'를 통해 늘어 놓는 말이 나는 싫었다. 혹여 그런 꾸밈 많은 라디오 진행자가,  예쁜 목소리에 진행이 매끄럽다며  많은 사랑을  받는다해도 나는 그를 좋아할 수 없었고, 그런 방송은 들어줄 수 없었다. 귀를 후벼가며 '안 들은 귀 사요!'를 외쳤다. 내 듣는 귀가 그러하니,  방송에서 내가 하는 말을 가장 먼저 듣는 내 귀를 위해서라도 가짜 말을 하지 않기로, '~척' 하는 것은 경계하기로 마음 먹었다. 목소리만으로도  나를 휜히 느낄 수 있는 방송을 하고 싶었다.


"정연주 아나운서 라디오 진행이야 솔직하 매끄럽기로 유명하죠."

면전에서 이런 칭찬을 받은 적이 있다. '솔직함'을 알아봐주니 고마웠으나, '매끄럽다'는 평가가 귓바퀴에 걸렸다. 칭찬을 받아 헤벌쭉 좋아하거나 또는 겸손함을 보여야 했으나, '매끄럽다'는 얘기에 신경이 쓰여 계속 뽀로통했다.   

"정연주의 뜨거운 인터뷰는 아나운서의 노련한 진행이 돋보인다."

프로그램 모니터 평가에서 보인 한 줄이었다. '돋보인다'니 긍정적이나, '노련'이 눈에 걸렸다. 흠...노련하다고...

그도 그럴 것이, 내 맘 속 <정연주 방송사전>에는 '매끄럽다'='흥미롭지 않다', '노련하다'='참신하지 않다' 로 나름의 정의가 내려져 있기 때문이었다.

그 날부터, 나란 인간, 고민을 하기 시작한다.  


"어떻게 해야 덜 매끄러울 수 있지? 어째야 덜 노련하지?"



   

연극 <도둑맞은 책>과의 첫 만남은 솔직히 그저 그랬다.

제자A의 작품을 훔쳐 슬럼프를 벗어나 화려하게 재기에 성공한 작가B가 어느 날 휠체어에 묶인 채, 알 수 없는 공간에 갇혀있다. 그를 납치해 가둔 사람은 그의 밑에서 보조작가로 일하던 후배C.  C는 B가 A에게 어떤 짓을 했는지 다 알고 있었고, 그것을 모티브로 픽션인듯 논픽션인듯한 글을 쓰도록 B를 다그치고 협박한다.

흥미로운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배우들의 연기 흐름에 딱히 흠이 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2인극이 주는 팽팽한 긴장감을 느끼기에는 무언가 겉도는 공연을 봐 아쉬움이 컸다.

그러고나서 만난 B역할의 또다른 배우 박호산.

인터뷰를 진행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나는 그에게 작품에 대한 나의 솔직한 평가를 '들키고' 말았다.

"내 것으로 꼭 다시 한번 봐요."

어눌한 듯 아닌 듯, 웃음기를 머금은 듯 아닌 듯한 목소리로 나온 그의 말에는 진심이 단단하게 박여있었다.


그와 인터뷰를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단호한 권유에 숙제를 하듯 다시 본 <도둑맞은 책>은 인터뷰 전 봤던 작품과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뻔히 아는 내용임에도 긴장했고, 이미 본 구체적인  장면과 대사임에도 웃을 수 있었다. 심지어 박호산과 호흡을 맞춘 상대 C역할의 배우는 인터뷰 전에 봤던 회차에서도 공연한 배우였음에도 완전히 다른 C였다.

배우 박호산의 마법이었다.

인터뷰 당시 나이 46세. 대학로의 터줏대감. 20년 이상 대학로의 모든 것과 함께한 배우. 연극만 해서 성북구에 집을 산 배우.  나이 마흔이 되기 전까지는 연극 무대 외에 다른 매체에 가지 않겠다는 고집을 부렸다는 배우 박호산의 노련함을 단박에 느낄 수 있는 공연이었다.  


공연 내내 단 한번의 퇴장도 없는 B역할의 어려움에 대해 묻자,

"갇혀있는 상황에 충실하다보면 시간은 흘러가더라구요."

나이 마흔까지 연극만 하겠다 한 것은, 달리 말해 다른 매체로 갈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냐는 질문에,

"좋아하는 사람들과 좋아하는 일을 하기에도 시간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무대에서는 배우가 예술가로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요. 배우에게 편집권이 있는 무대, 내 스스로에게 발전하는 기회를 줄 수 있는 무대가 주는 특별한 힘이 있어요."

연예인과 연기자는 어떻게 다를까 말을 꺼낸 내게,

"음..연예인은 들고 살고, 연기자는 놓고 사는 것 같아요."

 

관객과 말그대로 '호흡을 섞는' 공연을 해 온 노련한 배우의 곰삭은 답변이었다.





그런 그가 요즘 다양한 매체에서 제대로 연기하며 그만의 노련한 참신함을 과시하고 있다. 같은 공간에서 호흡을 섞는 관객 뿐 아니라 더 많은 관객들과 호흡하고 있다. 매끄러운 연기와 노련함이 돋보였던 무대 위 배우 박호산의 마법에 이미 빠져있던 나로서는 화면 속 그도 참 반갑다.


배우 박호산을 만나며 <정연주 방송사전>을 오랜만에 개정했다.

-  매끄럽다 : 진행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우며 시청취자가 함께 호흡하기에 전혀 걸리적 거릴 것이 없다.

-  노련하다 : 스스로 방송에 몰입하는 힘이 있어 시청취자로 하여금 함께 호흡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다.


대학로에서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던 '형'과 같은 느낌의 박호산 배우에게 "선배님, 술 사주세요." 하며 전화한다면, 요즘 문래동 카이스트로 살아가고 있는 그가 이렇게 대답할 것만 같다.

"[됴아! 난만 다버!] 

    

이전 04화 몸짓, 눈빛 그리고 김동원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