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몸짓'을 보는 눈이 생긴 건 내가 스스로 큰 '몸짓'을 배워본 이후였다. 2007년 이후 매일 저녁 라디오 생방송을 하며 만나야했던 어떤 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얻게 된 다양한 감정들을 해소하기 위해 머리가 아닌 몸을 좀 과격하게 움직여봐야겠다 생각했다. 등산과 발레를 시작했다.
맞다. 앞서 내가 배웠다는 큰 '몸짓'이 바로 발레다.
바(bar)를 잡고 기본 자세 하나하나를 익혀가는 재미가 생각보다 컸다. 거울 속 내 몸을 살피고 근육의 작은 움직임을 느끼며 자세를 만들어내는 게 버거웠지만 은근히 즐거웠다. 정적으로 느껴졌으나 머릿 속으로는 내 근육들에 한없이 집중해야 해 엄청나게 바빴다. 그 과정이, 그 몰입의 순간이 송송 땀방울을 만들어냈다. 거울 속 내 몸이 만들어내는 선은 뚝뚝 끊겼지만, 나를 가르치는 선생님의 몸이 만들어내는 선은 유려하게 이어져 발레 수업 내내 내 눈은 그 선을 쫓았고, 몸의 선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에 탄복을 거듭했다. 그렇게 몸이 만들어내는 선과 이야기에 집중하다보니 몸짓을 보는 내 눈높이는 높아져만 갔고, 한동안 발레며 다양한 무용공연을 찾으며 한껏 높아진 눈높이에 걸맞은 몸짓들을 부지런히 눈과 마음으로 담아냈다.
배우 김동원을 만난 무대는 <햄릿-더 플레이>였다. 햄릿 역으로 연극 무대에 데뷔했다던 김동원은 셰익스피어 서거 400주년을 맞아 다양한 '햄릿'이 만들어지던 해, <햄릿-더 플레이>라는 작품으로 다시 햄릿 왕자가 되어 무대에 섰다. 놀이이자 연극이란 뜻의 play를 달고 변형된 또 하나의 햄릿 이야기도 인상 깊었지만, 배우 김강우와 함께 더블캐스팅 된 김동원이란 배우의 몸짓도 눈에 들어왔다.
가늘고 긴 선이 시원시원했고, 움직임은 나풀거렸다. 새 같았고 물고기 같았다. 인터뷰를 위해 만난 그에게 찬사를 하니, 아니나 다를까 전작에서 현대무용수 역할을 했단다. 그의 몸짓을 알아본 내 눈에 셀프칭찬을 하며 우쭐했다. 이야기를 나누며 바라보는 김동원의 눈빛이 그의 몸짓을 닮아있었다. 수줍음에 흔들렸으나 깊었다. 시원시원했으나 강렬했고, 텅 빈 듯 하다 이내 꽉 찼다.
뭐든지 열심히 해본 적 없이 딱 중간 정도였다던 그는 대학교 첫 학기를 마치며 3.0이라는 성적을 받아들었단다. 그 어린 나이에도 그렇게 항상 어중간하게 살아도 되나 싶었단다. 경영학과에서 곧장 나와 열심히 하고 싶을 것을 찾아 연기를 전공하게 되었단다. 박근형 연출가와 작업을 하며 극단 '골 목길'에 들어가 내일이 없을 것처럼 매 순간을 살라는 연출가의 말씀대로 지내고 있단다.
이후 김동원과는 <모든 군인을 불쌍하다>에서 조선인 가미카제로, <프론티어 트릴로지>에서는 미 서부 개척시대의 인물로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극 중 인물들에게 솔직한 마음으로 다가가 열심히 연기하고 있었고 진중한 목소리와 깊은 눈빛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잘 들려주었다. 만나고 헤어질 때 마다 길다란 몸을 반으로 접는 '폴더식 인사'의 커다란 몸짓과 씩씩한 목소리는 매번 주변 공기를 출렁 흔들었다.
"모두 함께 춤추어라!"
배우 김동원이 <햄릿-더 플레이>에서 가장 좋아하는 대사란다.
아버지의 원한을 갚기 위해 삼촌에게 복수를 꿈꾸며 하루하루 불안하게 살아가는 인물로 그려지는 햄릿이 매순간을 그리 살고 싶지는 않았을 거라 생각했단다. 삼촌의 악행을 떠보려는 장치였다 한들 연극을 준비하고 춤을 추는 그 순간에는 진짜로 그저 춤을 추고 싶었을거라 느껴 온 힘을 다해 소리치고 몸을 움직여 그 순간을 채웠단다.
머릿 속이 복작거릴 때 거울 속 내 몸이 그리는 선에 집중하며 생각에서 도망쳐본 경험이 있는 내게도 와닿는 해석이었다. 커다란 몸짓에 묵직한 마음 내려놓을 수 있던 순간을 떠올리며 김동원에게 내 공감을 전하니 그는 그 큰 눈을 꿈벅이며 긴 목 끄덕이며 또다시 공감해준다.
마음이 굳어오고 생각이 막혀올 때, 커다란 몸짓을 만들어본다. 음악을 흘리고 거기에 맞춰 몸을 흐느적거리든, 어렵사리 익혔으나 요즘은 제대로 나올리 없는 발레 기본자세를 잡아보든 나의 몸짓에 집중해본다. 내게는 몸과 마음을 풀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누군가 그랬다. 마음이란 사회적인 몸(mindful body)이라고. 복수를 꿈꾸며 연극을 준비하던 햄릿 왕자도 그 어느 날 밤에는 몸을 풀며 잠시라도 주변인들과 엉킬대로 엉켜있는 사회적인 몸인 마음을 풀어헤치고 춤을 추었으리라. 그날의 그를 데려와 내게 소개해 준 김동원이 참 고맙다! 앞으로 김동원이 무대 안팎에서 그려낼 몸짓과 눈빛을 주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