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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정연주 Nov 20. 2017

그럴 때가 있다

그럴 때가 있다.

이도 저도 아닌 기분에 모든게 그저 그렇고 삶이 시시하게 느껴지는 때. 웃는 자에게 복이 온다느니, 거울은 먼저 웃지 않는다느니 하는 말들을, 머리로 애써 이해하려면 할 수는 있으나, 가슴으로는 진부하게 느끼며 도통 공감하기 어려워 썩(은 미)소를 날리게 되는 때. 어떤 어휘로든 감정을 규정할 수 없고 잘라낼 것인지 풀어낼 것인지 도통 감도 안잡히는 얽힌 실타래 같은 마음상태가 느껴지는 때.


그럴 때 보통은 자버린다. 자버리려 한다.

그러나 보통은 자버릴 수 없는 상황에 '그럴 때'가 찾아오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이 현실이다.   

그럴 때 만나 내 감정 상태가 그대로 '묵사발'이 되어버리게 만든 연극이 있으니, 바로 트릴로지 시리즈 중 처음 만난 <카포네 트릴로지>다.


3부작을 뜻하는 트릴로지(trilogy)시리즈는 각기 20세기 초, 미국 시카고를 배경으로 한 3부작의 '카포네', 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3부작의 '벙커', 미 서부 개척시대를 배경으로 한 3부작의 '프런티어'로 이뤄진 연극으로 영국 제스로 컴튼(Jethro Compton)의 작품이다. 그의 작품은 김태형 연출의 손을 거쳐, 배우들의 열연에 힘입어 신선한 연극으로 평가받으며 2015년 국내 팬들을 만난 이래 매 회 객석을 '90% 이상 채우는' 인기 연극의 반열에 오른다. (객석 수가 워낙 적은 것도 한 몫을 하긴 했다.)




처음으로 만난 카포네 트릴로지의 무대였던 시카고 렉싱턴 호텔 661호(로 꾸며진 공연장)에 들어가 앉을 때만 해도, 연극 <사이레니아>에서 이미 경험하고 학습을 한 덕에 '그러려니' 했다. <사이레니아>의 음습한 등대 안을 배경으로 했던 무대가, 호텔방으로만 바뀌어진 것 정도로 생각됐다. 무대와 관객석의 구분이 거의 없는, 호텔방에 빙 둘러 놓여진 100여개의 의자가 바로 관객석인, 호텔방이 바로 무대인 것에 바로 적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왠 걸, 호텔방이라는 낯선 듯 익숙한 공간에서 세 명의 배우들이 손닿을 거리에서 펼치는 70분짜리 연기는 적응할 만한 무언가가 아니었다. 너무도 가까운 그들과의 거리는 부담스러웠고, 한껏 끌어올려져 있는  감정 밀도는 숨막혔다. 이야기를 쫓아가기도 전에 내 감정 상태는 말 그대로 기진맥진했다. 이도 저도 아닌 기분과 얽힌 실타래 같은 마음상태로 한마디로 엉망진창이었던 머릿 속과 가슴 속의 무언가가 압축이 되다되다 짓이겨지다 터져버렸다. 빠앙!

 

지척에 있는 배우들에게 누[누:]가 될까, 나란히 앉은  관객들에게 폐[폐:]가 될까 걱정도 되었지만, 내가 살고 볼 일이었다. 심호흡을 연신 해야 했다. 아직 극에서 채 빠져나오지 못한 채 상기된 얼굴로, 혹은 눈물 그렁그렁한 눈으로 관객들에게 인사하며 커튼콜을 받는 배우들의 얼굴을 보는 순간에도 심호흡을, 아니, 한숨을 쉬어댔다. 박수를 보내고는 있으나 힘겹다. 이게 뭐지 싶은데 공연 시작 전의 내 감정상태와는 확실히 다름을 느낀다. 기분이 좋아졌다거나, 정돈됐다거나 하는 식의 단순한 표현은 역시 불가하나, 70분 전의 그것은 확실이 아니었다. 한껏 압축되었다가 소멸되었다는 것이 그나마 가장 가까운 표현일 듯 하다. 이런 걸 '카타르시스'라고 한다고 했던가. 머리로만 익숙했던 개념을 드디어 처음으로 체득하는 순간이다.        



이후 트릴로지 시리즈를 기다리는 관객의 한 사람이 되었고, 총 9가지의 이야기를 2년에 걸쳐 모두 봤다.

첫 경험 만큼 모든 에피소드에서  강렬함을 맛보았다고는 할 수 없었으나, 좁은 공간에서 주어지는 밀도감과 집중력에 힘입어 70분간 쫄깃거리는 심정을 9번 더 느낄 수 있었다. 운 좋게도 각 시리즈의 배우들과도 인터뷰 할 수 있었고, 관객의 한사람으로, 그들에게 '경의'를 직접 전할 수도 있었다.



카포네에서 만난 코 끝까지 연기하는 윤나무


벙커에시 만난 각잡힌 훈훈함과 형형한 눈빛을 보여주었던 박 훈.


마지막 프런티어 시리즈에서 만난, 삵 김동원, 사자 최수형, 토끼 김우혁(세 배우가 서로에게 닮은 꼴 동물이라며 얘기해 준 것들이다.)




그들에게 조금 뒤늦은 고백을 이렇게나마 전한다.



"오, 그대들! 그대들은 진정 내게 카타르시스를 안겨주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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