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전과 함께 시작되는 연극.
암전은, 무릎을 스치며 아슬아슬 제 자리를 찾아들었던 관객이 내는 거친 숨소리와, 무대에 대한 기대를 나누는 친구와의 소곤거림과, 팔짱에 이은 손 깍지 그리고 남자친구의 어깨에 머리를 살포시 기대려는 여자의 몸짓이 내는 야릇한 소리 등을, 순식간에 잠재운다.
암전은, 관객에게 현실을 접고 무대를 응시하라, 조용하지만 과감히 명령한다.
나는 암전의 시작과 끝, 무대에 조명이 들어오기 직전의 그 짧은 순간을 즐긴다. 단호함이 주는 짜릿함이 있다. 빛이 차단되는 동시에 내 안팎도 차단되는 그 순간이 매번 설렌다.
연극 <아들>을 통해 오랜만에 무대에 오른 배우 조덕현을 인터뷰하기 위해 미리 연극을 챙겨보는 날이었다. 그 날은 참으로 오랜만에, 연극 시작 직전 헐떡이며 공연장에 도착하던 여느 때와 달리, 넉넉하게 들어가 무대며 관객들을 살피며 공연장에서 틀어주는 잔잔한 음악에도 귀 기울여보며 여유를 즐길 수 있는 날이었다. 관객들에게 휴대폰 종료 등 주의사항을 얘기하는 매니저의 음성을 끝으로 암전. 평소보다 더욱 짜릿한 마음으로 암전의 그 순간을 즐길 수 있었다.
그러했기 때문이었을까? 암전이 걷히고 무대의 핀 조명이 켜짐과 동시에 배우가 관객들을 향해 내뱉은 첫 대사에 이리 오래도록 가슴이 울렁거리는게? 마치 그동안 내 생활에서 암전 상태 속에 있던 무엇인가에 조명을 잔뜩 때려넣은 듯 했다. 그 대사는 다음과 같았다.
"나는 아들입니다."
연극 <아들>은 장진영 감독이 직접 쓰고 연출한 영화로 먼저 알려진 작품이다. 영화에선 차승원이 주인공으로 나와 그 이전 모습들과 달리 진지한 얼굴로 열연했다. 살인을 해 무기징역수가 된 A가 귀휴기회를 얻어 치매를 앓고 있는 어머니를 만나러 간다. 어머니가 살고 계신 그 집에는 어릴 적 얼굴 밖에는 본 적이 없는 A의 아들 B가 함께 살고 있다. 치매걸린 어머니는 자신의 아들 A를 알아보지 못하고, A는 자신의 아들 B가 낯설다. B는 아버지이기 이전에 살인자로 느껴지는 A에게 경계심을 늦추지 못한다. 그런 A와B가 하루를 같이 보내며 아들로서 아버지로서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을 섬세하게 그렸다.
연극 <아들>에는 치매걸린 어머니이자 할머니인 한 명의 여배우와 그녀의 아들인 무기징역수, 그리고 무기징역수의 아들이자 치매를 앓고 있는 할머니를 돌보는 손자인 고등학생, 그 손자의 절친, 무기징역수를 데리고 나온 교정시설 직원 등이 등장한다.
암전이 끝남과 동시에, 시작부터 내 마음을 때린 그 첫 대사는, 무기징역수의 아들이자 할머니의 손자가 2층으로 만들어진 무대 위 쪽에서 교복 차림에 가방을 맨 채, 관객을 향해 내뱉은 말이었다.
"나는 아들입니다." 라는.
이 세상 모두는 누군가의 아들이고 딸이다. 그러나 살아오면서 그리 명징한 목소리로 나는 아들이라고, 나는 딸이라고 말해본 적은 없다. 너무 당연한 말이었고, 입 밖에 낼 필요가 없는 말이었다.
암전이 끝나고 무대에 핀 조명이 들어와 순식간에 빛이 스며들듯, 그 대사 한마디에 '딸' 이라는 존재로의 나를 갑자기 떠올리게 됐다. 맞다, 나는 딸이다.
제 잘난 맛에 우쭐하는 나일때도, 두 아들의 엄마일 때도, 다른 여인의 아들의 아내일 때도, 모두 나는 아빠 엄마의 딸이었음에도 그걸 잊고 살았다.
연극이 내게 주는 감흥 중 하나가 바로 이러했다. 익숙해 잊고 있던 것을 자각하게 하기. 당연한 것을 낯설게 바라보기. 그리고 그런 일은 불현듯 다가온다. 불현듯! 말그대로 '불을 켜 불을 일으키는 것'과 같은 그 과정으로 나를 끌고 들어가는데 있어 암전이 얼마나 톡톡한 역할을 하는지 그 날, 연극 <아들>을 보며 새삼 느끼게 되었다.
그 날 이후 종종 써먹는다. 암전을 내 일상에 가져온다. 뭔지 모를 감정에 괜히 머릿속 복잡해질 때 암전의 순간을 갖는다.
눈만 감아봤자 암전이 바로 되지는 않았다. 눈을 감는 동시에 그 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연극 시작 직전 암전을 머릿속으로 구현한다. '훅' 한꺼번에 내 의식의 스위치도 내려버린다.
효과가 있었다. 신경쓰이는 그 무언가를 암흑 속에 잠시 둘 수 있었다. 조명이 들어오듯 눈을 떴을 때 그 무언가는 암전 속에서 희미해졌거나, 그것 대신 다른 데로 조명이 쏟아져 시선을 돌릴 수 있었다.
오늘도 잠시 암전을 써먹는다. 거울 안에서 웃고 있는 내 피부가 엉망이다. 눈가 주름이 좀 더 짙어진 것 같고 턱선이 조금씩 무너져내리는게 신경쓰인다. 자연스러운 일임에도 유난히 오늘따라 거슬린다. 에잇! 암전!딸깍! 다시 조명 온! 암전의 효과가 먹혔다. 거칠어진 피부 대신 생기있는 눈빛을 발견해냈다. 다행이다.
그리고 엄마한테 전화해서 어리광이라도 부려야겠다 싶다. 어쨌든 나는 우리 엄마의 어여쁜 딸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