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도서관에서 발견한 한국 책 읽기
내가 미국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은 네 번째 책은 ‘마님 되는 법’이라는 책이다.
진산, 「마님 되는 법」 , 부키, 2002
우지연이라는 본명을 가진 이 책의 작가는 대학에서 연극을 전공하고 진산이란 필명으로 무협작가로 활동하며 민해연이란 필명으로 로맨스 작가로도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재미있는 제목처럼 뭔가 마님이 될 수 있을 제대로 된 비법을 전수해줄 것 같아서 빌린 책이 무협소설을 쓰는 작가의 책이라니!
지극히 개인적이고 편협한 사고를 가진 나에게 무협지나 무협소설이란 것은 내가 십 대였던 시절, 철없는 또래 남자애들이나 추리닝 입고 만화가게에서 노닥거리거나 동네를 어슬렁거리던 아저씨들이 읽는 책이었다.
서점에서 책을 사야 하는 경우였다면 다가가지도 않았을 책이고 한국의 도서관에서 책을 빌렸다면 펼쳐보지도 않았을 책이다.
미국 도서관 한편에 언어 별로 분류된 영어 외 서적 코너 중 한국어 코너에 온갖 종류의 한국어로 된 서적이 섞여있는 곳에서 ‘다시 책을 좀 읽으며 살아야겠다’는 꿈에 부풀어 제목을 훑다가 무슨 내용일지 궁금해서 집어온 것이 무협소설 작가의 책이었다.
책을 읽기 전, 제목도 신기한 이 책에 무슨 내용이 있나 펼쳐보다가 무협작가가 쓴 책이라기에 내가 왜 이 책을 골랐을까 스스로 황당해서 헛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빌려온 책이니 읽어나 보자고 읽기 시작했는데 너무 재미있어서 시간이 날 때면 얼른 다음 페이지를 읽고 싶어 졌다.
무협작가가 쓴 책답게 비접 전수 서적 같이 시작된 글이 부부관계에 대한 이야기로 그리고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한 작가의 생각으로 이어지면서 나는 잠깐 느꼈지만 잊었던, 또는 깊이 인지하지는 못했지만 내 마음에 스쳐갔던 생각들을 글 속에서 발견했다.
작가 진선은 무협소설만 잘 쓰는 것이 아니라 삶의 사소한 문제나 삶의 단편들을 깊이 생각하고 그 생각을 진솔하고 명쾌하게 전달하는 작가였다.
그녀의 책에서 나는 부부관계를 넘어서 사람과의 관계와 인생에 필요한 희대의 비전을 배웠다.
글을 읽어보니, 저자 진선은 지혜로운 게으른 여인이어서 마침내 마님의 자리에 올랐고 자신의 남편인 삼돌이를 행복한 삼돌이가 되도록 보듬으면서 마님답게 살고 있었다.
저자 말대로 사람의 성향이나 상황이 다 다르기 때문에 그녀의 마님 비법이 모두에게 적용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한 번쯤 유쾌하고 읽고 그녀의 엉뚱하면서도 현명한 삶의 철학에 공감하며 무릎을 칠 수 있는 의미 있는 책이었다.
‘마님 되는 법’이라는 책을 바탕으로 나의 이십 년 가까운 결혼 생활을 돌아보자면, 사실 나는 마님이 되는 것에 실패했다.
그리고 이십 년 가까이 살아온 부부생활을 뒤집기에는 이 책을 너무 늦게 읽었다.
어쩌면 이십 년 전에 읽었어도 나는 마님이 될 수 없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나는 대단히 바지런하고 정갈하지는 못해도 마님에 될 정도까지 게으르지 못하다.
또한 제멋대로 고집을 세우면서도 막상 마님이 될 만큼 강단이 세지 못하니 말이다.
그리하여 결국, 지금 우리 집에는 자신을 삼돌이라고 생각하는 남자, 내 남편과 자신을 삼월이라고 생각하는 여자, 바로 내가 산다.
내가 볼 때는 결코 삼돌이가 아닌데 남편 스스로는 자신은 삼돌이라고 생각하며 언젠가 대감마님이 되고 싶다고 꿈을 꾸며 사는 것 같다.
나는 결혼 전에 마님을 꿈꾸기는 했으나 결혼과 함께 그것은 감히 엄두를 낼 수 없는 허황된 꿈이었다는 것을 알고 알아서 삼월이로 살아왔다.
그러고 보니 우리 부부는 대감마님도 마님도 없는 곳에서 스스로 삼돌이와 삼월이가 되어 살고 있는 셈이다.
그리 생각하니..... 참, 씁쓸하구나.
하지만 살다 보니 삼돌이와 삼월이로 사는 것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다.
나이 먹는 것의 좋은 점은 삼월이여도 이제는 적당히 몸도 사리고 게으름도 피우며 큰소리치는 중견 삼월이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남편 또한 중견 삼돌이로 적당히 꾀를 피우며 농땡이를 치는 것에 능숙해지고 있다.
진선과 같은 마님으로 살지 못해 아쉽지만 나는 스스로 마님스럽다 여기는 삼월이로 살자 생각했으니 그거면 되었다 싶다.
글에서 찾은 생각
진선의 ‘마님 되는 법’이라는 책에서 이 구절이 제일 좋았다
타인은 나와 다르고, 아무리 가까운 사이에도 거리는 있는 것을. 그리고 인정하기 씁쓸할지 몰라도 그 '거리'의 쓸모 있음을 긍정할 때 좀 더 세상살이가 편해지는 것을 어찌하랴.
두 사람 사이에 0의 거리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부모 자식 간에도, 부부 사이에도 마찬가지다
대인 관계의 원칙이란 결국 '거리'에 대한 선택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거리를 떼기 위해 행동하는가, 아니면 거리를 좁히기 위해 행동하는가, 혹은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행동하는가
정말로 누군가와 사이좋게 오래 살고 싶다면, 거리를 좁히려고만 애를 쓸 것이 아니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게 더 현명하지 않을까?
그렇다. 나의 관계 철학이 바로 이러하다
나이라는 숫자가 늘어갈수록 내가 점점 더 깊이 깨닫게 되는 것이 바로 관계에서 거리 유지의 유익함이다.
좋은 사람일수록 그 좋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 거리를 무시하고 뛰어넘으려다가 결국에는 서로가 상처를 입고 그 귀한 사람을 잃게 되기도 한다.
가끔은 나도 찰싹 달라붙고 싶을 만큼 좋은 사람을 만날 때도 있고, 적당히 다가오는 나에게 서운함을 느끼는 이들도 있겠지만 그 거리 유지가 서로 오래가는 비법이라고 믿는다.
좋아서 너무 다가가다가 작은 일로 사람을 잃는 것보다는 조금 멀리서 오래 보고 한참을 가도 적당히 좋은 그런 거리를 유지하는 관계 속에서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