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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마다 소풍 Sep 13. 2019

명절 증후군과 명절 스트레스,  미국에도 있어요.

조금 다른 미국인들의 명절 스트레스 이야기

추석이 다가오니 한국 뉴스에 명절 증후군 이야기와 함께 요즘 세대의 명절 풍속도를 담은 기사가 눈에 많이 띄었다.  사위나 아들도 명절 스트레스가 있겠지만 단연 며느리들의 명절 스트레스 수위가 여전히 제일 높을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요즘은 분위기가 많이 바뀌어서 취준생, 미혼남녀들의 명절 스트레스 이야기들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명절이 좋았던 것은 맛있는 거 실컷 먹고 용돈 받는 맛에 명절을 기다리던 철 모르던 어른 시절, 그때뿐이었던 것 같다. 대단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었음에도 명색이 며느리라고 명절 스트레스를 느끼던 한국에서 살던 때, 나는 명절 스트레스나 명절 증후군은 한국인들만의 이야기인 줄 알았다.


그런데 미국에 와서 살면서 적지 않은 미국인들이 명절 증후군에 시달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우리나라 사람들이 느끼는 강도에는 비할 수는 없겠지만 다른 나라 사람들도 여러 가지 다른 모양새로 명절에 대한 스트레스를 느끼며 살고 있는 듯하다.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의 많은 미국인들은 종교와 상관없이 추수 감사절(Thanks Giving)과 성탄절(Christmas) 그리고 부활절(Easter)에 온 가족이 함께 하는 시간을 갖는다.
우리가 설이나 추석에 모이는 것처럼 결혼한 자녀들과 부모들이 모이는 그들의 큰 절기인 셈이다.


한동안 백인 할머니 선생님이 가르치는 반에서 영어를 배운 적이 있다. Easter(부활절)이 다가올 무렵, 백인 할머니는 손주들과 Egg hunt를 하려고 준비했는데 딸네 가족이 시가에 간다고 해서 실망스럽다고 했다. 그러면서 작년에는 아들네 가족과 딸네 가족이 모두 자기 집에 와서 손주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고 추억하였다. 아마도 그날 며느리네 부모와 사위네 부모는 쓸쓸한 부활절을 보냈겠지만 선생님 입장에서는 두 자녀 가족이 모두 자기 집에 오기는 바라는 마음이 들 수밖에 없는 모양이었다.  


Thanks Giving(추수 감사절)이 얼마 안 남은 어느 날, 친하게 지내는 미국 친구와 함께 커피를 마시게 되었다. 친구에게 추수 감사절에 친가나 시가에 가냐고 물었는데 갑자기 그 친구의 표정이 변하더니 그것 때문에 남편과 싸웠다며 울분을 토하듯이 시부모에 대해 불평을 하였다.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매년 절기 당일은 시가에서 보내고 다음 날 친가에 가서 함께 식사를 하곤 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 혼자 지내고 남동생은 아직 미혼이어서 올해는 절기 당일에 친정어머니와 시간을 보내고 다음 날 시가에 간다고 했더니 시어머니가 화를 냈다는 것이다. 남편도 우물쭈물하면서 내켜하지 않아서 명절날 친구와 아들은 친가에, 남편은 시가에 가기로 했다면서 분을 삭이지 못했다. 그 친구는 그 해 성탄절에도 남편과 아들만 시가로 미리 보냈다. 그리고 아들을 데려가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면서 자기는 친정어머니와 성탄절을 보냈다.   


함께 미국 학교에서 일하는 동료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절기 때마다 다들 비슷한 고민들을 하거나 적당한 타협안을 정해서 절기를 보내곤 한다. 결혼한 자녀가 있는 동료들은 아들과 딸에게 명절 전에 올 것인지 당일날 올 것인지, 아니면  자기가 아들이나 딸 집에 언제 갈 것이지를 정하는 것에 사돈과의 보이지 않은 신경전을 펼친다. 며느리나 사위인 동료들은 배우자의 부모 집과 자기 부모의 집을 언제 갈 건지, 아니면 누구의 부모님을 언제 오시라고 할 건지 조율을 하면서 은근히 기싸움을 하기도 한다.


물론 미국인들은 우리나라보다 합리적으로 명절을 준비해서 딸네 집과 아들네 집 또는 부모 집에서 번갈아 모이거나 음식을 각자 준비해 와서 먹든지 나가서 사 먹기 때문에 명절 음식 준비나 설거지 같은 스트레스를 호소하는 경우는 드물다. 하지만 명절에 시집 식구들과 모일 것이냐 친정 식구들과 모일 것이냐, 시집 식구 모임을 먼저 할 것이냐 친정 식구 모임을 먼저 할 것이냐에 대한 묘한 명절 스트레스가 미국에는 존재한다. 


게다가 두 사돈네 가족이 멀리 떨어져 살면 그 갈등은 더 클 수밖에 없다. 워낙 땅이 넓어서 명절에 동부와 서부, 또는 중부에 떨어져 있는 양쪽 집을 다 들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경우네는 아들네 가족이 처갓집 식구들과 모이느라, 또는 딸네 가족이 시집에 가느라 자기 집에 오지 않아서 쓸쓸하고 속 쓰린 명절을 보내는 시부모나 친정부모에게 명절 증후군이 발병하기도 한다. 또한 친정어머니가 만든 칠면조 요리를 먹으며 추수 감사절을 보내고 싶은데 시집 식구들의 모임에 가야 하는 며느리와 자기 부모와 함께 선물을 뜯으며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싶은데 처갓집 식구들과 시간을 보내야 하는 사위들에게 명절 증후군이 발병하기도 한다.




우리나라도 점차 명절 음식 준비나 제사 등의 부담이 줄어들고 있는 것은 명절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이들에게 기쁜 소식이다.  언젠가 우리나라도 미국처럼 명절에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절기를 축하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에 의의를 두며 명절 집안일의 스트레스는 많이 사라질 것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시집과 친정집, 본가와 처가를 둘 다 갈 수 없고, 양쪽 부모의 마음을 다 만족시킬 수 없으니 딸과 며느리, 아들과 사위로 사는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피할 수 없는 명절 증후군이 남아있을 수 있다.

 

명절 음식과 집안일 스트레스를 없앤 후, 명절 스트레스나 명절 증후군 없이 즐거운 명절을 보내는 법을 현명한 미국인들에게서 배우면 어떨까?


내 동료들 중에는 가족들 간의 어떤 갈등 없이 명절 연휴를 가족 파티처럼 즐기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부모와 자녀 그리고 형제자매들이 서로의 상황과 살고 있는 지역을 고려해서 추수 감사절과 성탄절에 모이는 순서를 합리적으로 정한다. 부활절은 연휴가 없어서 가까이에 사는 가족들이 아니면 모이지 않기 때문에 크게 문제를 삼지 않는다. 모이는 장소도 돌아가면서 정하거나 음식을 나눠서 준비해서 명절 준비의 피로를 최소화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 가족들의 부모들은 사돈의 마음도 헤아려서 과한 욕심을 내지 않는다. 아들네 가족이 우리 집에 오는 명절에 사돈네는 딸이 없는 명절을 보내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다.




지금쯤 많은 며느리와 사위들이 시집이나 친정에서, 본가나 처가에서 추석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그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이 여전히 각자 다른 모양으로 명절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을 것이다.

 

나를 비롯해 그런 이들이 시부모나 친정 부모가 될 때 즈음에는 명절 증후군이나 명절 스트레스 같은 말이 사라지게 되었으면 좋겠다. 독립한 가족들이 모이기 쉽지 않은 분주한 세상에서 온 가족이 함께 얼굴을 마주하며 맛있는 음식으로 명절을 즐기는 날이 오면 좋겠다.


그러려면 일단 나부터 명절마다 내 아이들을 내 품에 두려는 욕심을 버려야겠지? 우리 집만 아니라 사돈들도 가족이 북적이는 명절을 보낼 수 있도록 서로 양보해야겠지?

아직 친정 부모나 시부모가 되려면 한참 남은 처지에 태평양 건너 추석의 기운은 요즘 말로 '1도' 느껴지지 않는 미국 땅에서 혼자 엉뚱한 생각에 잠겨보는 추석 날이다.

엉뚱한 생각 한 가지더, 다음 명절에는 명절 증후군이나 명절 스트레스에 대한 기사가 팍 줄어드는 명절을 보내는 우리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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