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만들던 눈사람과 미국에서 만난 눈사람 이야기
눈 내리는 날이면 눈사람 한 개씩은 만들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동네 골목에서 버려진 연탄재를 눈 밭에 굴려 만든 커다란 눈덩이에 그보다 작은 눈덩이를 낑낑거리며 올려놓은 뒤, 주변에서 찾은 돌멩이나 나뭇가지로 눈코입을 만들었던 어렴풋한 기억도 있다.
기분이 내키면 내 목에 둘러있던 목도리를 둘러주기도 하고 동생의 털모자를 씌워주기도 했다.
겨울 햇살에 조금씩 녹아내려 눈사람의 형태가 허물어지기 전까지 눈사람 옆을 지날 때마다 눈사람을 향해 손을 흔들어주기도 했다.
내 모든 추억 속의 눈사람은 조금은 일그러진 둥근 머리 아래 커다란 배를 가진, 숫자 8 모양의 눈사람이 전부였다.
8자 모양 눈사람이 전부였던 시절, 어디에서였는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미국 눈사람 그림을 본 적이 있다.
당시 8자에 머리 하나는 더 얹은 눈사람의 모습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눈사람은 눈을 굴려 만든 커다란 눈덩이에 그보다 작은 눈덩이를 얹은 8자 모양이어야 했다.
수박에 오렌지를 하나 얹거나 운동회 때 공 굴리기 경기에 사용하던 공 크기의 눈덩이에 농구공 만한 눈덩이를 얹은 것과 같은, 뚱뚱한 배에 그것보다 작은 동그란 얼굴의 비율을 가진, 머리와 배로 이루어진 그런 익숙한 모양의 눈사람 말이다.
그런데 내가 본 그림 속의 미국 눈사람은 조금 큰 눈덩이에 그보다 약간 작은 눈덩이 그리고 조금 더 작은 눈덩이가 차례로 쌓아 올려진 3층짜리였다.
사이즈도 수박에 멜론 그리고 배 하나 얹거나 농구공에 배구공 그리고 그보다 조금 작은 탱탱볼을 얹은 것 같은 균형있는 몸매에 머리와 가슴 그리고 배로 이루어진 눈사람이었다.
그 뒤로 3층짜리 눈사람을 그림책이나 만화에서 종종 만나면서 미국 눈사람은 그런가 보다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 시작했지만 8자에 머리 하나 더 얹은 이상한 모양새가 여전히 신기했다.
그것을 보면서 미국 사람들은 키가 크다더니 그래서 3층으로 날씬하게 만드나 보다 생각하기도 했다.
게다가 더 신기했던 것은 내가 아는 눈사람은 나뭇가지나 돌멩이 같이 주변에 있는 걸로 코를 만들어 끼웠는데 미국 눈사람은 늘 얇고 기다란 당근 코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미국인들은 코가 높아서 기다란 당근을 끼우는 모양이라 생각했다.
나중에 누군가가 겨울철에 먹을 것이 없는 동물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미국인들이 눈사람 코에 당근을 끼워놓는 것이라고도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기왕 배려할 거면 눈에는 귤이나 토마토를, 웃는 입은 콩알을 쪼르르 박아놓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눈 구경이 쉽지 않은 캘리포니아에서도 12월에 접어들면 온 동네가 크리스마스 장식을 하고 그와 함께 3층짜리 눈사람이 불을 반짝이며 한 자리 차지한다.
학교에서도 눈사람은 애용되는 장식품이자 가장 많이 사용되는 미술 시간의 만들기 소재가 된다.
그 눈사람들도 머리, 가슴, 배로 이루어져 있고 당근 코를 가지고 있거나 그게 아니더라도 길고 뾰족한 코를 가지고 있다.
지점토로 만든 눈사람도 머리와 가슴, 배를 가진 3층짜리이고 3개의 마시멜로우로 만든 눈사람에게는 길쭉한 프레즐 코가 끼워지기도 한다.
40년 동안 2층짜리 눈사람만 만들어와서 그런지 처음에는 동네나 상점에서 만나는 3층짜리 눈사람이 애벌레 같기도 해서 우습게 느껴졌는데, 미국에서 여러 해를 살다 보니 이제는 3층짜리 눈사람에 점차 익숙해져 간다.
같은 눈을 가지고 만든 눈사람이 국가나 문화에 따라 다른 모양을 가진 것이 신기하다.
사람들의 피부색이나 생김새가 다른 것처럼 그 나라 사람들이 만드는 눈사람의 모습도 달라지는 모양이다.
높은 산에나 가야 눈을 볼 수 있는 캘리포니아에서 겨울 기분을 내기 위해 오늘 우리 반에서도 눈사람을 만들었다.
당연히 머리와 가슴, 배로 이루어진 3층짜리 눈사람이었다.
지난달에는 지점토로 만든 3층짜리 꼬마 눈사람에게 나뭇가지 팔을 끼우고 목도리를 둘러주기도 했다.
3번 방 꼬마들처럼 생긴 눈사람이 나란히 선 것을 보니 웃음이 났다.
우리나라 2층짜리 눈사람이 머리+가슴 그리고 배로 이루어진 거미라면 미국의 3층짜리 눈사람은 머리와 가슴 그리고 배로 이루어진 곤충인 걸까?
벌레를 몹시 싫어했던 나는 벌레와 비슷하게 생긴 곤충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왠지 징그럽게 느껴지는 거미도 곤충 중 하나라고 생각하며 자랐다.
그러던 어느 수업 시간에 거미는 곤충이 아니라는 선생님 말씀에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그전까지 나는 정말로 거미가 곤충인 줄 알았다.
6개의 다리에 머리와 가슴, 배 세 부분으로 나누어지는 곤충과 달리 8개의 다리에 몸이 머리가슴과 배 두 개로 나누어진다는 이유로 곤충이 될 수 없다니.
과학적인 지식 없이 보면 거미는 딱 곤충처럼 생겼는데 말이다.
이번에 2탄까지 나온 Frozen의 대표 캐릭터인 눈사람 올라프(Olaf)도 머리, 가슴, 배의 곤충 몸매에 당근 코를 가지고 있다. 물론 이 특별한 눈사람은 두 다리까지 달려있다.
갑자기 머리와 배만 있는 거미 같은 울라프를 상상하니 둔하게 뭉기적거리는 울라프가 될 것 같아 웃음이 난다.
우리나라 눈사람을 거미라고 생각하니 어쨌든 그래도 머리와 배만 있는 2층짜리 눈사람보다는 머리가슴과 배를 가진 거미 눈사람이 좀 더 따뜻하고 인간적인 느낌이다.
미국 눈사람처럼 머리와 가슴, 배로 가슴을 따로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일단 뭔가 따뜻하고 좋은 것이 들어있을 듯한 가슴이란 말이 머리에 붙어 있으니 말이다.
사실 머리가슴을 가진 거미 눈사람이든 가슴이 따로 있는 곤충 눈사람이든, 눈사람은 그 존재 만으로도 다정하고 친근하며 따뜻한 어떤 것을 떠오르게 하는 능력이 있는 것 같다.
눈사람이 2층이건 3층이건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구와 함께 눈사람을 만들었는지, 눈사람과 함께 어떤 추억이 기억되는지, 눈사람과 함께 아련하게 떠오르는 것들이 중요한 것이리라.
아~ 갑자기 눈 내리는 겨울날, 눈덩이를 굴리던 시절로 몹시 돌아가고 싶다.
꽁꽁 언 손으로 눈사람을 만든 누군가와 함께 뿌듯하게 웃으며 따뜻한 웃음을 나누고 싶다.
마치 크리스마스 카드나 동화 속에 나오는 한 장면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