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 생명들에 대하여
전철역에서 내려 집으로 가는 길, 감자탕집이 하나가 있었다. 24시간 영업했던 그곳은 낮에는 식사 손님, 밤에는 술손님들로 늘 북적였다. 하지만 코로나 19가 퍼지고, 영업시간이 단축되자 북적이던 그곳도 한산해졌다. 서서히 빈자리가 늘어가던 가게는 몇 달 전, 내부 수리 공지를 내걸었다. 넘어진 김에 쉬어 간다고 장사가 잘 안 되는 김에 내부 수리를 감행했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주인이 바뀌어서 새 단장을 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나도 그곳에 불은 켜지지 않았다. 대신 각종 고지서가 입구에 쌓여갈 뿐이었다.
그날도 집으로 향하다 어두컴컴한 그 가게 안을 무심코 흘깃 들여다보다 깜짝 놀랐다. 거대한 화분들이 메말라 죽어가고 있었다. 한두 개가 아니었다. 아마도 개업 축하 선물이란 이름으로 감자탕집에 입성했을 대형 화초들. 영업하고 있었다면 살뜰하게 물도 주고 잎도 닦아줄 사람이 있었겠지? 이제 쓸만한 집기들은 빠지고, 먼지만 쌓여가는 그 텅 빈 곳에 죽어가는 화초들만 남아 있었다. 핫도그 하나 쥐어준 엄마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라는 그 말만 믿고 해가 질 때까지 돌처럼 앉아 기다리다 미아로 발견된 아이처럼. 서글서글한 인상에 손님한테 깍듯하게 인사하던 감자탕집 사장님은 여러 생명을 그곳에 두고 떠났다. 혼자서는 움직이지도 못하는 연약한 녀석들을. 뭐가 그리 바빴을까? 뭐 때문에 그리 서둘러야 했을까? 가게 문을 닫으면서 내부 수리 공지는 정성스럽게 내걸 정도로 손님들에게는 친절했지만 화초들에게는 한없이 잔인한 사람이었다.
제주도에 살 때, 한적한 거리에서 종종 이곳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을 품종견을 만날 때가 있었다. 처음에는 주인을 잃어버린 개인 줄 알았다. 곧 주인을 만나 따뜻한 집으로 돌아갈 거라 믿었다. 동화 속 해피엔딩을 상상하던 내게 현지인들은 현실이라는 찬물을 끼얹어 주었다. 사정을 들어 보니, 같이 여행을 왔다가 개는 남겨두고 주인만 혼자 육지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주인은 오래전부터 계획했지만 개만 그 의미를 몰랐던 마지막 이별 여행. 그렇게 비행기표를 끊을 수도 없고, 바다를 건너 헤엄쳐 갈 수 없는 개들은 고스란히 섬의 유기견이 된다. 아무리 사람에게 길들여진 개라 해도 배가 고프면 본성이 나온다. 몸과 마음의 상처가 얼마나 큰지 낯선 이가 가까이 다가가기만 해도 날카로운 하얀 이를 드러내며 경계하곤 했다. 겁쟁이 쫄보인 나는 버려진 개들이 안쓰럽긴 했지만 무서워 선뜻 다가가진 못했다. 그저 고달픈 거리의 삶을 끝나길 바랐다. 인간에게 버려졌지만, 다시 안락한 삶을 되찾으려면 인간에게 기대야 하는 얄궂은 운명. 씁쓸하지만 그게 현실이었다.
주인에게 버려진 후 들개가 된 제주의 개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말라비틀어져 가는 화초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아마 머리채 잡히듯 누런 잎째 뽑혀 쓰레기봉투로 갈까? 아니면 바로 앞 공원 화단에 버려져 또 다른 생명을 키울 거름이 될까? 한때 사랑스러웠던 반려견은 사람을 위협하는 들개가 되었고, 회색 도시 속에서 초록의 생기를 불어넣어준 화초들은 누런 잎을 휘날리는 쓰레기가 되었다.
한 때 개를 키워 보기도 했고, 지금도 화분을 넘치게 키우는 집에서 평생을 살고 있다. 그래서 한 생명을 건사하는 일이 얼마나 수고로운지 조금은 안다. 내가 주 양육자 혹은 관리자는 아니지만 생명 있는 것들을 내 새끼처럼 돌보는 사람을 곁에서 지켜봐 왔으니 말이다. 그 책임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알기에 살아 숨 쉬는 것들을 함부로 들이지 못한다. 쉽게 정을 주지 못한다. 그 누구도 이런 엔딩을 예상하고 동물을, 식물을 집에 들이진 않을 거다. 하지만 그 엔딩은 언제 어떤 모양으로 닥칠지 아무도 모른다. 야반도주하듯 화초들을 내팽개치고 사라진 감자탕집 사장님에게도 나름의 사정이 있었을 거다. 말 못 하는 한낱 풀떼기들까지 챙길 여력이 없었을 거라 믿고 싶다. 그에게는 풀떼기보다 소중한 무언가가 있었을 테니. 감자탕집 유리창 안으로 날이 갈수록 누렇게 색이 바래져 가는 화초들을 아침저녁으로 지나치며 다짐했다. 감당하지 못할 일은 애초에 시작하지 말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