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 때마다 날 정신 차리게 만드는 주문 : 너 뭐 돼?
시루 안의 콩나물처럼 바늘 하나 들어갈 틈 없는 빽빽한 수다가 오가는 술집 안. 다들 얼큰하게 취했으면서도 누가 내가 말할 타이밍을 채갈까 100m 달리기 선수처럼 전력 질주하고 있었다. 분명 같은 테이블에 둘러앉았는데 그 대화에 좀처럼 끼기 어려웠다. 내가 전혀 모르는 내용의 이야기였다는 게 첫 번째 이유였고, 두 번째 이유는 그 주제에 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표정이 무섭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술자리 대화의 많은 주제가 그렇듯 대중매체를 통해 공개된 누군가의 불행이 수다의 도마 위에 올랐다. 불운의 원인은 뭔지, 어느 쪽의 잘못이 더 큰지, 만약 내가 그 상황이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지 등등 다양한 각도에서 수다가 이어졌다. 이런 대화에도 자연스럽게 끼고 해야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녹아들고, 어울릴 수 있을 텐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 적어도 나에게는.
기사 한 줄, 짧은 동영상으로 그 사람의 삶과 인생을 타인이 이러쿵저러쿵 판단할 할 수 있을까?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지금 어떤 상황에 부닥쳐 있는지 100% 알 수가 없는데 내가 뭐라고 누가 잘못했고, 누가 더 낫고를 결론(?) 지을 수 있을까? 당사자가 동석한 게 아니었는데도 타고난 쫄보스러운 생각 때문이었다. 내 상황조차 깔끔하게 정리하기 어려운 나는 누군가의 상황과 그 선택을 비난할 이유와 걱정할 여유가 전혀 없었다.
그러니 대화에서 한 발짝 떨어져 수다 떠는 사람들의 표정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핫이슈 인물들과 일면식 없는 사이라도 상상 속에서 비슷한 상황과 처지를 시뮬레이션해 본 사람들에게는 옅은 연민이 은은하게 깔려 있었다. 그 위로는 두껍게 ‘신났음’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그런 최악의 상황은 겪지 않은 ‘나님이 위너!’ 라던가 ‘그런 대우받고 살지 않는 나님의 인생이 낫지’ 같은 타인의 불행을 밟고 올라선 자의 흥은 과도한 아드레날린을 분비하고 있었다. 분명 입으로는 관심과 걱정이라고 말했지만, 그 바닥에는 최악의 인생보다는 낫다는 탄탄한 우월감이 두툼한 매트리스처럼 깔려 있었다. 그 위를 신나게 뛰어다니는 사람들. 수다의 대상은 A에서 B로 넘어갔지만, 타인의 불행이라는 줄기는 변하지 않았다. 매스 미디어에 전시된 C, D, E, F... 불행의 구렁텅이에 빠진 존재들이 줄지어 기다리고 있었다.
발은 고작 오른쪽, 왼쪽 딱 두 개뿐인데 신발장이 터져 나가도록 신발을 사들이는 슈어홀릭처럼 타인의 불행 쇼핑에 중독된 사람들. 사람마다 각자 가지고 있는 내 안의 구멍들을 타인의 불행으로 채우는 것처럼 보였다. 그대로 뒀다가는 점점 커지는 불안이라는 구멍을 남들의 불행으로 틀어막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자기 가슴속 구멍의 개수가 많고 깊은 사람일수록 보다 열정적이고, 악착같이 누군가의 불행을 잡아 물고 뜯고 씹고 맛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피에 굶주린 좀비처럼 무자비하고 탐욕스럽게 느껴졌다.
관심의 초점이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비극으로 향하려고 할 때, 마법의 주문을 속으로 조용히 읊조린다. 혹시... ‘너 뭐 돼?‘ 타인의 불행을 밟고 올라선들 내가 뭐 대단한 사람이 될 리가 없으니까. 누군가의 비극으로 수다의 시간을 채울 순 있을지 몰라도, 내 안의 구멍을 완전히 메꿀 수는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