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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Sep 05. 2023

거절이 두려운 습관성 호구들을 위하여

‘잘’ 거절하는 방법의 딜레마

 웹서핑 중 동영상 클립을 보다 이 말에 급소를 맞은 듯 헉! 소리가 나왔다. 브레인들이 모인 엔터테인먼트사 뮤지션들이 단체로 출연한 웹 예능 프로그램의 일부분. 이 회사 대표이자 업계 대선배가 후배이자 소속 뮤지션에게 전화를 걸어 부탁하는 상황이었다. 정답률 7%를 기록했던 수능 수학 문제를 풀어달라고 청했다. 다급한 소속사 대표의 전화를 받은 엘리트 후배는 상황을 전해 듣고 말했다.

 

웹예능 <출장 십오야 : 안테나 뮤직 편> 중에서

그는 벼르고 별러 기대하던 미슐랭 식당에 왔고, 이제 막 음식을 먹으려던 참이었다. 오를 대로 오른 지금의 흥을 깨고 싶지 않다며 정중하고 단호하게 거절했다. 예상치 못한 거절에 당황함도 잠시, 회사 대표이자 선배 뮤지션은 ‘즐겁게 식사를 하라‘며 전화를 끊었다. 엔터테인먼트라는 업계의 유연함, 회사 대표와 소속 뮤지션을 넘어 음악계의 선후배라는 관계 등등 내가 알지 못하는 그들만의 세계가 분명 존재할 거다. 하지만 조직이라는 곳에 속해 있는 한 누군가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야 하는 사이라는 건 변치 않는다. 조직의 일원 중 저렇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적어도 나 같은 개복치 심장을 가진 사람 중에 저 말을 내뱉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거다.      


아니요. 지금 안 그러고 싶은데 왜요?     


그래. 그때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습관성 호구였던 내가 해야 했던 대답을 이제야 찾았다. 과거의 나는 왜 이렇게 단호박처럼 말하지 못했을까? 늦어도 한참 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거절 못 하는 성격이 고민인 시절이 있었다. 비흡연자인 내게 던지듯 넘어온 판촉물 휴대용 재떨이부터 각종 종교의 포교용 전단, 관심 없는 사람의 관심, 선 넘는 조언, 개고생이 뻔한 일거리, 영혼을 갈아 넣어 봤자 다른 사람의 공으로 넘어갈 결과가 보이는 프로젝트 등등 원치 않으면서도 거절하지 못해 떠안고 낑낑거리며 살았다. 그 무게를 견디다 압사당하기 직전, 겨우 더는 못하겠다며 고심 끝에 어렵게 거절을 하면 천하의 몹쓸 사람이 됐다. 조심스럽게 사양하면 ’ 네가 그럴 줄 몰랐다.‘ ’ 나는 너만 믿고 있었는데 네가 이렇게 거절하면 나는 어떡하냐?‘ 등등 ’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거절 못 하는 사람이 제일 괴로워하는 ’ 나쁜 사람‘ 프레임을 씌운다. 떠넘기는 사람들은 거절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잘 파악하고 그걸 교묘하게 이용한다.


세상은 참 이상하기도 하다.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가 되는 세상이니까. 친절하게 대하면 막대하기 시작한다. 호락호락하면 호구 잡힌다. 거절하지 못하는 성격의 소유자라는 인식이 생기는 순간 하기 싫은 일, 곤란한 일, 힘든 일을 고스란히 떠넘긴다. 처음에는 시한폭탄 같은 일을 떠넘긴 상대방을 원망하다 원망의 화살은 곧 자신에게로 향한다. 애당초 거절했으면 이렇게 괴로워하지도 않았을 거라며 자책하고 만다.     


일은 일대로 하고, 누군가를 원망하는 마음에 죄책감에 휩싸인다. 결국은 나 자신을 미워하는 괴로움의 굴레를 빠져나오지 못한다. 호구 탈출을 위해 책을 뒤지고, 선배 호구들의 경험담을 물어보고, 혼자 시뮬레이션을 해보기도 했다. 어떻게 하면 상대의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않고 거절을 ’잘‘ 할 수 있을까? 많은 시도와 시행착오 끝에 하나의 답을 얻었다. 애초에 나의 바람은 실현될 수 없는 거였다. 상처 주지 않고 거절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거절하는 순간 뭐가 됐든 상대방은 기분이 좋을 수 없다. 절대 거절하지 않을 거라 믿은 사람에게 거절당했기에 어쩌면 더 큰 충격일 수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늘 차선을 두고 있다. 나만 바라보고 있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나 아니어도 제2의 호구, 제3의 호구가 존재한다. 그러니 꼭 나까지 그 호구 대열에 끼어들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거절하는 그 순간의 민망함에 대해 눈 꼭 감으면 몸과 마음의 편안함은 오래간다. 순간을 참지 못해 떠안는 찰나, ’ 괴로움의 쳇바퀴‘에 다시 들어간다. 쳇바퀴에서 탈출하고 싶다면 죄책감 따위는 접어 두고 눈감고, 귀 막는 연습부터 착실히 할 필요가 있다.    


어떻게 해야 '잘' 거절할까? 고민할 필요가 없다. 상처 주지 않는 거절은 없다. 지금 내가 최고급 미슐랭 식당에 온 뮤지션은 아니지만 말은 이렇게 할 수 있으니까. 호구에서 탈출하고 싶다면 눈 딱 감고 단호박보다 더 단호하게 말해 보자.     


아니요. 지금 안 그러고 싶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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