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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Aug 29. 2023

남을 후려치면 당신은 그만큼 올라가나요?

미스터리한 관계의 물리학

부지런한 참새처럼 조잘조잘 이야기하길 좋아하는 후배가 있다. 나보다 머리는 하나 더 있을 만큼 듬직하지만, 마음은 섬세하고 다정한 친구다. 만날 때마다 숨 쉬는 것도 잊을 만큼 끊이지 않고 말을 하는 통에 음료 한 모금 마시고 숨 고르고 이야기하라고 브레이크를 잡아 줘야 할 정도다. 이사한 동네의 카페에서 밥을 주는 길고양이의 사랑과 전쟁 뺨치는 연애사부터, 난생처음 도전해 본 공모주 청약 수익으로 해보고 싶은 것들을 꼽아 보는 일까지... 장르도 초월하고 시공간도 넘나드는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한다. 이제 막 커리어의 성장판이 열린 시기다 보니 아무래도 일에 대한 고민이 많다. 우리가 함께 일했던 그 친구의 막내 시절을 떠올리면 하나의 표정이 떠오른다. 배변 패드를 앞에 두고도 아무 곳에나 볼일을 봐서 혼나는 강아지처럼 한껏 쪼그라든 모습이다. 그런데 어느새 훌쩍 자라 자기 영역을 굳건하게 지키는 용맹한 녀석이 됐다.           


실무자 이상의 위치로 가는 길목에 있다 보니 언젠가 하고 해보고 싶은 <기획 프로젝트>에 대해 말할 때는 눈이 보석처럼 반짝였다. 그 모습이 신기하고 대견해서 반가사유상의 온화한 미소를 머금은 채 후배를 바라보게 된다. 누가 시키는 일 하기에 바빴고, 이 지겨운 거 언제 끝나나 매일 죽상을 하고 살았던 후배 연차 시절의 내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시절의 나와 비교하면 단단한 녀석이다. 회의 때, ‘네 생각은 어떠냐고?’ 불쑥 의견을 물었을 때, 질문이 들어올지 예상 못 했는지 아니면 시선이 모이는 것만으로도 긴장됐는지 우물쭈물하며 양쪽 볼이 불타오르던 게 엊그제 같은데... 언제 이렇게 무럭무럭 자라서 이토록 대견한 생각을 하지? 싶었다. 내가 키운 것도 아니고 알아서 잘 자란 건데도 뿌듯함은 내 몫이 됐다.       


며칠 후, 지인과 수다를 떨다 이 잘 자란 후배에 대해 이야기가 나왔다. 이런 기획에 대해 생각하는 후배가 있다고. ‘라테’는 생각도 못 했는데, 참 진취적이라고 칭찬했다. 내 얘기를 들은 지인은 이마를 살짝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야! 그거 안 먹혀.

이건 이래서 안 되고. 저건 저래서 안 될 거야.

네가 아낀다는 그 후배, 감은 좀 없나 봐?

그걸 굳이 하겠다면 이렇게 해보면 어쩌고 저쩌고...           


으응? 아이디어를 낸 당사자도 아닌데 귀 끝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이 자리에 없는데도 블루투스로 까이고 있는 후배에게 미안했다. 내 이야기의 방점과 지인이 꽂힌 방점이 미묘하게 엇갈린 거다. 내가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아이디어의 실현 가능성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저 연차에 이런 생각을 하는 ‘후배의 적극성’이었다. 프로젝트의 성공을 바라며 비장한 표정으로 모인 회의실에서 한 이야기도 아니고, 친한 선배와의 편한 수다 자리에서 꺼낸 설익은 아이디어가 이렇게 까일 일인가? 하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자기 아이디어에 대해 열을 토해내며 설명하는 지인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평가는 일단 접어뒀다. 지금 이 순간은 평가할 타이밍이 아니니까.       


침을 흩뿌리며 열변을 토하는 지인의 표정에는 우월감이 흥건했다. 같은 업계에 있는 연차 많은 사람의 눈에는 분명 후배의 아이디어 속 구멍이 보였을 거다. 연차도, 연봉도, 경험도, 생각의 폭도 후배와 비교할 수 없을 위치의 사람이니 단순 비교할 필요가 없다. 악의가 있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지인은 그 후배와 옷깃 한 번 스친 적 없을 테니 그저 내가 전달한 구멍 숭숭 뚫린 정보의 아이디어로만 후배를 판단할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더 신랄하고, 현실적인 답변을 해줬다고 믿는다. 지인의 후배라는 그 친구가 더 나은 아이디어를 내는 실력자가 되길 바라며 애정을 담은 조언을 해줬다. 하지만 조언도 때와 장소 그리고 상대방이 들을 마음과 귀가 열렸을 때 해야 비로소 그 본연의 임무를 다하게 된다. 하나라도 이가 빠지면 꼰대의 잔소리가 되기 쉽다. 내 미적지근한 반응을 눈치챘는지 지인은 재빨리 다음 주제로 대화를 넘겼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는 여전히 질문 하나가 둥둥 떠다녔다.          


상대를 깔아뭉개면
그만큼 당사자는 높이 올라갈까?

잠들기 전까지도 이 질문을 머릿속에 뱅뱅 굴리며 물음표의 곡선을 다림질해 반듯한 느낌표로 만들어 보려고 노력했지만, 끝내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대신 마음속으로 문장 전체에 가로로 긴 취소선을 그어버렸다. 알게 모르게 이 문장에 동의하는 사람이 많다고 해도 나는 그러지 않기로 다짐했다. 내가 원하는 걸 쉽고 빠르게 얻는 방법이라고 해도, 그 지름길은 가지 않기로 결심했다. 상대를 짓밟으면서 올라간다 한들 거기서 보이는 게 제대로 된 걸까? 그게 온전히 내 것일까? 그렇게 남을 깔아뭉개고 올라가서 성과를 얻는 사람은 되고 싶지 않다.           


남들보다 높은 곳에 서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누군가를 깔아뭉개고 올라서는 법. 그리고 다른 하나는 난 그대로 있는데 남들이 들어 올려주는 법. 전자는 악착같아야 하고, 후자는 억척스러운 구석이 있어야 한다. ‘악착‘과 ’ 억척‘ 비슷해 보이는 단어지만 뉘앙스는 살짝 다르다. 악착같이 깎아내리는 대신, 좀 무식하더라도 억척스럽게 내 방식대로 가기로 했다. 좀 돌아가더라도, 발이 피곤하더라도 마음 편한 길을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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