늪에 빠진 당신에게 보내는 미지근한 시그널
그런 날이 있다. 꼼짝하기 싫은 날. 손끝에 쇳덩이라도 달린 듯 무겁고, 등에는 초강력 자석이 붙은 듯 침대를 벗어나지 못하는 날 말이다. 내 마음이 지옥이어서 세상으로 나갈 엄두가 도저히 나지 않을 때가 누구에게나 있다. 마음이 여전히 한겨울이어도, 세상의 봄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두꺼운 얼음이 녹고, 솜사탕 같은 벚꽃들이 흐드러지게 피는 계절이 오고야 만다. 이때가 아니면 다시 1년을 기다려야 하는 '한정판 아름다움'이 경쟁을 벌여도 마음이 한겨울인 사람 눈에는 들어오지 않는다. 겨울잠에 취한 곰처럼 빛도 안 드는 어두운 곳에서 웅크리고만 있다. 그 언젠가 올라올 ‘겨울의 엔딩 크레디트‘를 기다리고만 있다. 분명 내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언젠가 술자리에서 <친구가 오래도록 늪에 빠진 상태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로 열띤 토론을 한 적이 있다. 의견은 정확히 반으로 갈렸다. 반은 무조건 밖으로 끌어내야 한다고 했다. 어쩌면 스스로 털고 일어설 힘이 없을 수도 있으니 손을 내밀어 주는 게 맞다고 했다. 혹 본인이 그런 상태로 있다면 꼭 그렇게 해달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반면 절반의 친구들은 아직 마음이 안 섰는데 억지로 끌어내면 더 악화될 수 있으니 기다려 줘야 한다고 했다. 역시나 본인이 그런 상태라면 절대 강제로 밖으로 끌어내려고 하지 말아 달라 부탁했다.
극 내향형 인간인 난 후자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였다. 당사자의 마음이 아직 그럴 상태가 아닌데 물리적 힘을 써서 잡아당기면 그 관계는 끊어질 위험이 있다고 믿는다. 상대가 어떤 마음으로 손을 내미는지 알지만, 그 사람의 마음마저 생각하기에 내 마음에 여유가 눈곱만큼도 없다. 다른 이유는 없다. 머릿속에는 폭탄이 떨어지고, 주검이 널브러진 전쟁터 상태다. 이기적이라고 손가락질할 수도 있겠지만 누군가가 걱정하는 그 마음을 헤아릴 여유란 없다. 내 속엔 그저 내 고민으로만 꽉 차 있다.
만약 가족이, 친구가, 사랑하는 사람이 이런 상태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당사자이기도 했고, 방관자이기도 했던 나. 그런 시간이 지나 내가 택한 방법은 단순하다. 그 사람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는 것. ‘네 손 닿는 거리에 내가 언제든 항시 대기하고 있다 ‘는 믿음을 주는 거다. 그게 깊은 늪에 빠진 그들을 위해 내가 택한 방법이다.
맛있는 스콘 집 발견했는데 언제 같이 갈래?
그 전시회 며칠 안 남았다는데 시간 맞으면 가자!
서둘러야 해! 대하철 끝나간다. 그 대하구이 집에 가자. 언제든 콜 해~
너 좋아하는 그 감독, 새 영화 나왔더라. 언제 보러 가야지?
먹는 걸로 꼬시고, 좋아하는 걸로 유혹한다. 여기서 포인트는 게으른 고양이가 솜방망이 같은 앞발로 건드리듯 무심하게 ‘툭‘이다. 힘줘서 강요할 필요도 없고, ’ 아니면 말고’ 같은 건조한 톤으로 내뱉는다. 세월을 낚는 느긋한 강태공의 마음으로 임한다. 낚싯대 끝의 찌가 움직이나 아니가 유심히 살핀다. 10번에 8번은 미동도 없다. 그래도 괜찮다. 세상의 기적 중 가장 위대한 기적인 ‘밍기적’이 일어날 테니. 그 밍기적은 2번쯤이면 충분하다. 시간과 온도, 계절과 의지, 상황과 분위기 모든 게 절묘하게 맞아떨어져야 가능한 일이라는 걸 안다. 그 하찮고 사소한 ‘꼬심‘이 적중하면 희뿌연 흙탕물 속에서 가라앉아 있던 그들을 환한 세상 밖으로 꺼낼 수 있다. 집에서 꺼내 햇빛으로 소독도 하고, 맛있고 기운 나는 걸로 에너지를 채워준다. 콱 막혀 있던 코와 머리에 바람을 넣는 것, 그거면 충분하다. 어차피 혼자 해결해야 하는 길고 고독한 싸움이 될 테니. 지치지 말라고 응원하는 ’미지근한 지지자’, 그게 내 역할이다.
거절당해도, 읽씹 당해도, 상처받아도 던진다. 시냇가에서 돌멩이를 던지는 아이처럼, 끊임없이 던진다. 퐁당퐁당. 그러다 딱딱하게 굳은 줄 알았던 상대의 마음에 미세한 금이 생긴다. 그 금을 계속 공략하다 보면 철옹성 같은 마음의 벽도 언젠가 허물어지게 마련이다. 무너져야 하는 건 마음의 벽인데, 사람이 무너지고 나서야 그래서 사람을 잃고 나서야 후회할까 봐 부지런히 던진다. 그때 왜 한 번 더 물어보지 않았을까? 뒤늦은 후회가 부메랑처럼 날아와 내 가슴을 후비기 전에 던져야만 한다.
평소 뭔가 앞에 나서는 일이 거의 없는 내향형 인간. 그런 사람이 뭘 하자고 하는 건 딱 두 가지 의미다. 하나는 사이비 종교나 다단계에 빠진 비정상적인 상태라는 의미. 그게 아니라면 그건 당신을 늪에서 꺼내고 싶다는 강력한 신호다. 그럴 때 못 이기는 척 그 손을 잡아 주길 바란다. 그래도 괜찮다. 물론 당신의 고통을 100% 이해할 수도, 말끔히 해결해 줄 수도 없다. 하지만 적어도 어떻게 해야 그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지 여러 방법을 알고 있다. 그러니 내 안에서 도무지 답이 안 나올 때, 스스로 벗어날 힘이 없을 때는 ‘미지근한 지지자’들이 조심스럽게 내민 손을 잡아 보자. 덥석!
호사 작가의 신간 <먹는 마음>이 궁금하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