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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명랑한삐삐
Jun 03. 2023
깨진 벽과 오케스트라
독일 - 베를린
한 나라의 수도니까 가보긴 해야겠는데
가이드북을 보니 확 꽂히는 게 없었어요.
그땐 배낭여행이 내 인생에 들어온 초반이라 여행지의 랜드마크들을 빠짐없이 훑고 다녔는데
저는 베를린의 상징인 브란덴부르크문 앞에서 찍은 사진이 없습니다.
분명히 보긴 했어요.
숙소 가는 길에 멀리 시내버스 안에서요.
지나고 보니 놀라워요.
이건 역사 덕후로서의 면모와도 어울리지 않으니까요.
독일 북부 작은 마을에서 3주간 캠프를 하고 베를린에 막 도착했던 게
혹시 영향을
주었던 걸까요?
독일에 대한 이방인적 호기심이 최고조에서 막 꺾인 시점이었거든요.
그러니까 과장을 좀 하자면
서울 사람이 굳이 한강 유람선을 타지 않는 느낌이랄까요.
언어든 사람이든 건물이든 분위기든
뭔가 '독일적'인 것에 그새 익숙해져서
눈도 덜 휘둥그레지고 주변을 바라보는 게 약간 자연스러워졌어요.
이번 여행의 시작점 파리에서는 일주일 내내 얼마나 바쁘던지.
모든 게 신기하고 아름답고 감동적이고
내가 여길 언제 또 오나, 하며 쉬지 않고 다녔어요.
그런데 남의 대륙에서 두 달을 보내고 나니
이 성당이 그 성당 같고
이 미술관이 그 미술관 같고
이 나라 사람이 저 나라 사람 같고
결국엔 '위 아 더 월드'까지 가더라고요.
그래도 성취주의자로서 새 도시의 매력은 찾아내고 싶었어요.
저는 여기가 마치 내 일상인양 거리를 서서히 걸어보았어요.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봅니다.
사실 그것밖에 눈에 안 들어오죠.
군중 속에서도
부모 눈에는 내 자식만 들어오는 것처럼요.
제게 베를린은 이 두 가지였어요.
하나, 소니센터.
주말엔 베를린 필 공연실황을 전광판에 상영하더라고요.
널찍한 벤치에 다리 쭉 펴고 앉아 하늘 보면서 듣는 오케스트라 연주는 황홀했어요.
클래식 FM 애청자로서 그보다 몇 백배 웅장한 사운드 속에 있는 기분이 얼마나 대단했겠어요.
저는 앉은 시선으로 주변 사람들을 한 바퀴 돌아보았어요.
갑자기 부러움이 밀려왔어요.
난 돈과 시간을 모아 힘들게 여기까지 온 건데 이들은 이게 일상이구나.
아까 제가 독일에 약간 적응한 것 같다고 한 말을 정정해야 할 것 같군요.
저는 이 낯선 문화에 감동한 머나먼 동쪽 나라 이방인이 맞습니다.
개인이든 국가든 먹고사는 게 우선 과제일 수밖에 없지만
때론 당장의 호흡보다 삶의 질이 갈급한 순간들도 있기에
문화적 인프라는 그 역할이 점점 막중해지고 있어요.
아무 대가 없이 누릴 수 있는 것들이 많아지고
감수성이 춤출만한 공기가 가까이 풍겨오면 좋겠어요.
그럼 삭막한 우리들의 표정에도 언젠가는 서서히 습기가 스며들어올 거예요.
선진국이란 그런 것 아닐까요.
둘, 카이저 빌헬름 기념교회.
여름이라 오락가락 비가 살짝 왔는데 시내를 걷다가 높은 깨진 건물 하나가 보였어요.
전쟁의 상흔
.
빌헬름 2세가 그의 할아버지인 독일의 첫 번째 황제, 카이저 빌헬름 1세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교회인데
2차 대전 때 폭격을 당했
고
전쟁의 참혹함을 기억하자는 의미로 그대로 보존했고
대신 바로 옆에
교회를 새로 지었대요.
흑역사.
지우고 싶은 선택 혹은 결과가 뜬금없이 떠오를 때가 있어요.
되돌릴 수 없고 멈출 수도 없는데 이불킥 해봐야 무슨 소용 있나요.
흘
려보내야지요. 물론 쉽지 않은 일이에요.
대신 반성은 철저해야겠죠.
상대방에 대한 예의, 그리고 곧 자신의 발전을 위해서요.
남에게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은 마음은 누구 하나 다를 게 없겠지만
어제의 과오를 전면에 내보이며 내일을 기약하는
어느
선진국의 오늘을 느낄 수 있었어요.
다음에 이 도시를 다시 찾는다면 전엔 눈길 가지 않았던 것들을 보게 되지 않을까요?
다음에 저는 인생 어떤 이슈를 안고 베를린을 찾게 될까요?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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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한삐삐
여행 분야 크리에이터
360일의 보츠와나
저자
삐삐의 명랑함을 동경하고 창의적인 사람들을 존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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