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골레토 / La donna e mobile>
‘공연 관람의 시작이 어느 지점부터라고 생각하세요?’ 질문 자체가 꽤 추상적이라, 어떤 대답이 나와도 상관은 없습니다. 어떤 이는 서곡이 시작될 때라고 했고, 어떤 이는 자신이 객석에 앉았을 때부터라 했어요. 저는 공연 티켓을 예매한 순간부터라고 대답했는데, 제가 말해놓고도 ‘이렇게 멋진 대답이!’ 하며 감탄했어요. 즉흥적으로 말한 것치고 꽤 괜찮을 뿐만 아니라 이보다 더 명쾌한 답은 아직껏 찾지 못했거든요.
공연 예매는 보통 공연 시작일을 기준으로 한 달 여 앞두고 시작되는데요, 얼리버드 혜택이 있어서 티켓 오픈과 동시에 예매를 할 수 있으면 가장 좋죠. 하지만 한 치 앞의 일도 모르는 일상을 사는 이들이 한 달 앞의 공연을 예매하는 건, 모험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원하는 좌석에서 원하는 시간대에 공연을 보고 싶다면 남들보다 빨리 예매하는 게 좋습니다. 사실 공연의 설렘은 그 순간부터 시작되거든요. 예매를 한 날짜까지의 하루하루가 설레죠. ‘어! 2주 남았네?’, ‘어머, 낼모레구나!’ 한 달이나 남았다고 생각했던 그날은 D-2, D-1...... 코 앞으로 다가옵니다. 그리고 같이 보기로 한 친구가 있다면, 몇 시에 어디서 만날 건지, 어디서 오는 건지, 공연 후에 시간이 좀 있는지...... 얘기를 나누죠. 공연 날이 되면, 시간에 맞춰 공연장에 가기 위해서 아침부터 머릿속에 스케줄러가 작동됩니다. 지하철 시간이 잘 맞아야 하는데, 길이 안 막혀야 하는데, 밥이라도 먹고 들어갈 수 있으면 좋겠는데....... 가벼운 고민들은 행복한 설렘을 느끼게 해 줍니다. 그날도 설레는 마음으로 후배를 만났어요. 공연 전의 시간은 여의치 않아서 티켓박스 앞에서 만나 객석에 들어갔습니다. 그날 볼 오페라의 유명한 아리아는 수없이 들었지만 정작 공연으로는 처음 만나는 거라 무척 설렜어요.
바람둥이 만토바 공작은 꼽추 광대 리골레토에게 아름다운 첩이 있다는 걸 알고는 사람을 시켜 그녀를 납치해오게 하죠. 하지만 그녀는 첩이 아니라 숨겨놓았던 리골레토의 딸 질다였는데요, 질다는 학생으로 변장한 만토바 공작에게 마음을 빼앗겨 몸과 마음을 모두 줍니다. 리골레토가 이 사실을 알게 되고 복수를 위해 자객에게 만토바 공작을 죽여달라고 부탁하는데요, 안타깝게도 부탁을 받은 자객은 만토바의 또 다른 여자 막달레나의 오빠였어요. 막달레나가 우연히 이 계획을 엿듣게 되어 오빠에게 부탁을 합니다. 만토바 공작 대신에 가게에 제일 먼저 들어오는 손님을 죽여 리골레토에게 가져다주자고. 자객은 리골레토에게 만토바 공작을 죽였다며 자루 하나를 가져다주었고, 거기엔 공작이 아닌 자신의 딸인 질다가 죽어있었습니다. 리골레토는 고통에 몸부림치다 정신을 잃고 오페라는 끝이 납니다.
딸의 복수를 위해 한 남자를 죽이려 했는데, 결국 자신의 딸을 죽인 셈이 되었으니 내용만으로는 엄청난 비극이죠.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작품에서 가장 유명한 아리아는 주인공인 리골레토의 아리아도, 작품의 분위기에 어울리는 묵직한 아리아도 아닙니다. 하이마트 광고가 몇 번이나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제일 먼저 떠오르는 가사 ‘시간 좀 내주오!, 갈 데가 있소 / 거기가 어디오, 하이마트’. 하이마트 CF 음악으로 유명한 ‘la donna e mobile’는 베르디의 오페라 <리골레토>에 나오는 가장 유명한 아리아로, 우리에게는 ‘여자의 마음’또는 ‘여자의 마음은 갈대와 같아’로 알려져 있습니다.
La donna è mobile, Qual piuma al vento
Muta d'accento e di pensier, e di pensier
e di pensier! E sempre misero, Chi a lei s'affida
Chi le confida - mal cauto il cuore
Pur mai non setesi, Felice appieno, Chi su quel seno
non liba amore! La donna è mobile
Qual piuma al vento, Muta d'accento
e di pensier, e di pensier! e di pensier
여자의 마음은, 바람에 날리는 깃털 같아
말투도 생각도 변하지, 생각도! 생각도!
언제나 불쌍한 건 여잘 믿는 남자
경솔하게도 쉽게 마음을 빼앗긴다
완전한 행복을 느낄 수가 없지
가슴으로 사랑을 맛보기 전에는
여자의 마음은 바람에 날리는 깃털 같아,
말투도 생각도 변한다네, 변한다네! 변한다네
베르디는 이 곡이 공연 전에 알려지지 않게 숨겨두었다고 해요. 이 노래를 불러야 하는 테너 가수에게도 초연 전날까지 절대 사람들 앞에서 부르지 말라고 했답니다. 공연일이 되어 테너 가수가 이 노래를 부르자마자 다음 날 바로 히트곡이 되었다는데요, 듣자마자 귀에 쏙 박히고 따라 부르기 쉬운 중독성 있는 멜로디가 관객들을 사로잡은 것이겠죠? 지금이야 공연장에서 들은 노래가 인상적이라면 분명 누군가는 블로그나 유튜브에 포스팅을 할 테니 공연을 보지 않은 이들에게도 알려질 가능성이 크지만, SNS도 휴대전화도 없던 시절에 그것도 하룻밤 만에 오페라 아리아가 히트곡이 되었다는 건 그만큼 오페라가 흥했던 시 절이며 동시에 베르디 오페라 선율의 아름다움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여자의 마음은 갈대와 같아’ 이 가사가 바람둥이 만토바 공작이 여자를 만나기 전에 부를 노래는 아니지 않나 싶습니다만, 변하는 것이 어디 여자의 마음뿐이겠습니까. 남자의 마음도 변하긴 마찬가지겠죠. 어쩜 변하지 않는 것이 더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네요.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봄날은 간다 / 허진호 감독, 2001년)
베르디의 오페라 <리골레토>는 바리톤 파트가 주연을 맡는 몇 안 되는 작품 중의 하나로, 꼽추라는 장애를 가진 주인공 ‘리골레토’가 자신을 인간으로 존중해주지 않는 공작과 귀족을 향해 가진 분노와 저항심이 드러나는 작품입니다. 무엇보다 비극으로 막을 내리고 전체적으로 바리톤 음역대가 중심을 잡고 이끌어가는 작품이어서 공연이 끝난 후에도 묵직함이 남아있습니다
공연 시작 전, 서둘러 객석에 앉은 저와 후배는 예술의 전당 안에 있는 테라로사 카페를 찾았어요. 커피를 주문하는데 놀랍게도 30분 전까지만 해도 무대 위에서 주인공 리골레토 역을 연기했던 바리톤 다비데 다미아니가 바로 옆에서 커피를 주문하고 있는 게 아니겠어요? 와우! 맞는지 틀리는지 상관도 없이 ‘어머나! 우리가 방금 전에 당신의 공연을 보고 왔다. 리골레토가 너무 슬프다. 그런데 이렇게 카페에서 주인공을 만나다니, 믿기지 않는다’를 더듬더듬 말했고 함께 간 후배는 ‘저는 성악을 전공한 크로스오버 가수다. 사진을 찍어도 되겠느냐, 그리고 인스타에 올려도 되느냐?’고 물었는데 다비네 다미아니는 흔쾌히 ‘of course'라며 허락했고, 심지어 그날 밤 본인 이름의 해시태그를 검색해봤는지 우리와 인친이 되었어요. 공연 전후의 여유는 종종 뜻밖의 행운을 가져다준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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