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당신에 대해 조금 알고 있습니다

일상 속에 스며든 식물들의 목소리

by 행복한독서
쉐플레라, 몬스테라, 틸란드시아, 알로카시아….
우리의 이름을 몰라도 괜찮습니다. 그 대신 천천히 주위를 한번 둘러보세요. 우리는 그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당신 곁을 지켜왔으니까요.



우리는 당신에 대해 조금 알고 있습니다

권정민 글·그림 / 44쪽 / 12,800원 / 문학동네



엘리베이터 앞에서 키 큰 화분이 탑승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상하게도 제 눈에는 식물이 주인공이었고 인간은 대사 한마디 없는 ‘행인 1’처럼 보였습니다. 식물은 고용인, 인간은 피고용인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유유히 엘리베이터를 타고 건물 곳곳에 자리를 차지한 식물들의 표정이 머릿속에 그려졌습니다. 식물을 엘리베이터에 태우는 인간의 수고로움과 층수를 누르는 인간의 손가락도 떠올랐습니다. 인간은 그저 식물들의 명령을 따르는 심부름꾼이 아닐까, 새나 벌처럼 식물의 번식과 영토 확장을 돕는 존재가 아닐까 하는 음모론을 설계하면서 한동안 일상에서 마주치는 식물들을 빤히 들여다보았습니다. 내 쪽에서 시선을 줄수록 그들도 나를 꿰뚫어 보는 것 같아 흠칫한 순간도 있었습니다. 그 흠칫한 순간들이 모여, 인간의 대상으로만 존재했던 식물이 거꾸로 인간을 바라보는 주체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인간을 향해 내뱉는 혼잣말들을 상상하며 책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이 책의 화자는 식물입니다. 단순한 장치처럼 보이지만 이 톤을 만드는 데 많은 공을 들였습니다. 아무리 식물의 입장이 되려고 노력을 해보아도 저는 어쩔 수 없이 인간이므로 최대한 설득력 있는 화자를 만들기 위해서는 식물이 인간에 대해 얼마나 아는지 기준을 정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인간에 대해 너무 잘 아는 건 거북한 느낌이 들고, 그렇다고 너무 천진한 태도는 낯 뜨겁고, 너무 쿨하게 쓰니 정이 안 가서 불합격, 너무 수다스럽게 쓰자니 그림과 붙지 않아 탈락. 조금 아는 것 같기도 하고 모르는 것 같기도 한 아슬아슬한 선에서 줄을 타며 식물 화자만의 목소리를 가다듬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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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 정적으로 흘러가는 편이라서 글이 그림을 도와야 하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아주 작은 진폭이지만 강약을 주어 흐름을 타고 책장을 넘길 수 있도록 조사 하나, 어미 하나까지도 매만져야 했습니다. 식물이 사용하기엔 조금이라도 과한 표현이나 단어는 수정을 거듭해가며 걸러냈습니다. 집요함이라면 저도 뒤지지 않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저보다 더 집요한 편집자분들의 예리하고 섬세한 눈 덕분에 처음의 냉소적이고 투박했던 톤이 조금씩 편안하게 안정되어 갔습니다.


전체 구성을 마친 후에는 식물 세밀화를 그리듯이 펜으로 선을 긋고 점을 찍으며 그려나갔습니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경직된 선(아마도 틀리지 않으려고 애쓴 선)이 그림을 답답하게 만들었습니다. 식물은 살아서 말하고 있는데 그림에서는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아 부자연스러웠습니다. 모든 장면을 그린 상태에서 문제가 발견돼 절망이 컸지만 마음을 다잡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볼펜과 색연필로 부담 없이 한번 그려본 그림이 오히려 조금은 더 살아있는 느낌이 들어 지금과 같은 그림으로 완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림은 늘 어렵지만 이번 책에서는 특히 일상의 평범한 풍경 속에 ‘식물과 인간 사이의 미묘한 긴장감’을 표현하는 것이 큰 어려움이었습니다. 한 장면을 여러 앵글로 그리고, 렌즈를 당겨서 그리고, 다시 롱숏으로 밀어내어 반복해 그렸습니다. 하지만 역시 그림을 그리는 시간보다 망친 그림 앞에서 자학하는 시간이 더 많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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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갈나무는 나무꾼이 다가오면 부들부들 떨고 홍당무는 토끼가 나타나면 사색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식물에게도 보고 듣고 느끼는 기관이 존재한다고 하지요. 이 책에서도 식물이 인간을 관찰하는 화자임을 드러내기 위해 눈, 코, 입을 그려 넣었습니다. 개업식에 억지로 끌려 나온 식물들의 불만 가득한 표정, 야근을 하며 사무실 창가에서 쓰러져가는 알로카시아의 굽은 등을 표현해보려고 했습니다. 식물만큼이나 사람의 표현도 중요했습니다. 이 책은 식물에 관한 책처럼 보이지만 결국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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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는 화분에 눈길 한번 주지 않다가도 멋진 열대식물 앞에서는 사진을 찍는 사람들. 시들어가는 식물을 살려보려고 애쓰는 이의 뒷모습. 뒤늦게 물을 주지만 그 마음이 지나쳐 결국 과습으로 죽게 만드는 사람들. 식물을 원하는 것 같지만 실은 다른 무언가를 욕망하는 사람들 말이죠. 하지만 이 책을 식물과 인간의 관계로 생각했던 저의 협소한 의도와는 달리 독자들은 아주 가까운 곳에서 나도 모르는 내 모습을 지켜봐 주는 어떤 존재에 대한 책으로 읽어주시기도 합니다. 그런 독자들의 깊은 눈 덕분에 좁디좁은 저도 조금씩 넓어질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입니다.



권정민 작가는 방송작가로 활동하다가 그림책의 매력에 빠져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일상의 당연한 풍경에 물음표를 달아보고 새로운 눈으로 본 세상을 그림책에 담으려 애쓰고 있습니다. 쓰고 그린 책으로 『지혜로운 멧돼지가 되기 위한 지침서』가 있습니다.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19년 11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행복한아침독서 www.morningreadi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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