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 멧돼지가 민가로 내려오는 사건이 종종 뉴스로 나온다. 그런 뉴스가 전하는 바는 대체로 이렇다. 멧돼지가 거리를 ‘활보’하며 ‘난동’을 부리다 출동한 경찰에 의해 ‘사살’되었다.
나는 이런 어휘들이 무섭다. 앵커나 기자들은 어떤 생각으로 이런 단어를 쓰는 걸까. 생각 이전에 그저 무심코 지금까지 들어왔던 말을 그대로 옮기는 거겠지. 멧돼지가 왜 사람 사는 동네까지 내려와 이리저리 뛰어다니다 총탄에 목숨을 잃어야 하는지는 미처 헤아리지 못하는 거겠지. 천적이 사라져 개체 조절이 안 되는 멧돼지, 서식지 파괴로 살 곳과 먹을 것이 줄어드는 멧돼지, 얼떨결에 사람 동네까지 오게 돼서 놀라고 무서운 나머지 펄펄 뛰는 멧돼지. 그것도 마음 아프지만, 그런 멧돼지를 술 취한 불량배쯤으로 여기게 만드는, 그래서 총 맞아 죽는 게 당연하다고 느끼게 하는 말법이 더 마음 아프다.
우리는 모두 얼마쯤 그런 멧돼지다. 천성과 환경이 부딪쳐 갈등이 생기니 힘들고, 편안한 쉴 자리와 따뜻한 먹을거리는 보이지 않아 낙담하고, 갈 곳을 알지 못해 불안과 공포에 싸인 채 갈팡질팡 뛰는 일이 왜 없겠는가. 그런 힘겨움과 낙담, 불안과 두려움을 알아주고 달래주면서 마음을 밝혀주는 일은 예술의 중요한 기능이다. 결핍과 상처 없는 마음이 이야기와 그림과 음악을 간절히 찾지는 않으니까. 그중에서도 그림책은 다른 어떤 장르보다 더 짧은 시간에 더 깊숙이 부드럽게 마음을 매만져준다. 그래서인지 그림책으로 치유받고 각성하며 힘을 얻는 사람들의 모임과 활동이 점점 커져간다.
그림책은 인간, 특히 어리고 약하고 소외된 인간을 동물로 상징하고 대변한다. 그림책의 동물이 어떤 말을 어떻게 하는지를 보면 우리 인간이 어떤지를 돌아볼 수 있다. 사실은 우리 이야기지만 동물 이야기인 척 거리를 두기 때문에 더 자유롭고 다채롭게 말하는 그림책. 그래서 우리 자신을 더 넓고 깊게 이해하도록 만드는 그림책. 그런 동물 그림책의 말법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몇 권을 살펴본다. 우선 확실한 건 ‘활보’나 ‘난동’은 아니라는 점이다.
멧돼지로 말을 꺼냈으니 본격적인 (멧)돼지 책을 보자. 『지혜로운 멧돼지가 되기 위한 지침서』(권정민 / 보림)에는 앞서 말한 딱 그 상황에 처한 멧돼지 가족이 있다. 올망졸망 새끼들에게 젖을 먹이는 엄마 멧돼지 코앞에 밀어닥친 굴삭기. 뒤쪽은 낭떠러지니 기겁해서 난동을 부릴 만한 형편이지만, 멧돼지 엄마는 의연하다. 못마땅한 눈빛으로 굴삭기를 한 번 노려본 뒤 하루아침에 집이 없어져도 당황하지 말고 새 집을 찾아 나선다. 그리하여 자리 잡은 곳은 한 인간 가족을 밀어내고 차지한 높은 아파트!
집에는 집, 막무가내에는 막무가내로 대응한다는 구조가 너무 원초적이라 거칠어 보일 수도 있겠지만, 이런 원초성으로 핵심을 찌르는 것이 그림책의 매력 아니겠는가. 그 거친 구조를 부드럽게 덮어주는 것이 아이러니와 유머다. 의연하고 능청스러운 멧돼지의 표정과 몸짓, “힘들면 쉬어 갈 것.” “먹을 수 있을 때 충분히 먹어 둘 것.” “너무 무리하지는 말 것.” 같은 역시 능청스럽고 간결한 지침들은 상황의 비극성을 희극으로 돌려세우는 것이다. 멧돼지 가족이 지혜롭게 새 집을 찾아가는 동안 인간들은 미련하게 허둥대며 법석을 떨거나 그저 카메라만 들이대거나 하는데, 그런 장면에서 읽는 인간은 인간에 대해 피식 웃음을 날리거나 혀를 차는 여유를 부릴 수 있다. 새 집에 들어앉은 멧돼지 가족은 친구들에게 초대장을 보내고, 초대장은 굴삭기를 점령한 멧돼지 무리에게 전달된다. 어느 날 멧돼지들이 도심으로 몰려든다면, 집들이에 초대받은 친구들인 줄 알면 될 것이다.
이런 유머가 너무 가볍게 여겨진다면, 가열하게 진지한 말법을 쓰는 책도 있다. 예를 들면 『돼지 이야기』(유리 / 이야기꽃). 살처분에 내몰린 돼지들의 상황을 무서울 정도로 사실적으로, 돼지에 이입된 화자의 시각에서 펼쳐 보인다. 숨 막히는 검정 배경에, (다른 의미로) 숨 막히는 하얀 돼지와 하얀 눈. 콘크리트 쇠창살에서 살던 돼지가 생애 처음 밟아보는 흙이 자신을 생매장하는 무기가 되는 현장에 또 다시 숨이 막힌다.
이렇게 가열한 그림에, 글은 차분하게 또박또박 돼지 농장 현황을 밝힌다. 무겁고 건조하고, 어느 장면에서는 무서운 보고서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둡고 깊은 곳으로 추락하는 돼지들을 희고 높은 곳으로 끌어올려주는 말법을 그림책은 구사할 수 있다. 살짝 웃는 입, 평온하게 감긴 눈과 뭔가를 기대하는 듯 코를 치켜든 얼굴로 흰 눈 내리는 하늘을 올려다보는 돼지의 모습 덕분이다. 온통 흑백인 그림으로 300만 마리 이상의 돼지가 살처분당하는 현실을 보고하는 책의 말미에 환한 색으로 들판에서 뛰어노는 돼지 가족을 제시하는 소망의 장면 덕분이기도 하다. 지혜로운 멧돼지가 경쾌하게 띄운 희극적 상상, 농장의 돼지가 무겁게 보여주는 비극적 양상. 이 두 극단은 사실은 하나로 연결된 삶의 궤도이다. 깊은 땅 밑에서부터 높고 환한 저 위 사이에서 오르락내리락하는 삶의 여정을, 동물들이 그림책 속에서 이런저런 방식으로 말해준다.
인간과 가장 가까운 동물이라면, 아무래도 개와 고양이다. 그들을 일컫는 용어는 그저 키우는 개, 고양이에서 애완동물을 거쳐 반려동물이 됐다. 가족이라는 말이다. 개 엄마, 고양이 아빠가 이제는 우습지도 낯설지도 않다. 그러면 개나 고양이가 사람이 된 걸까? 사람이 개나 고양이가 된 걸까? 개/고양이와 사람은 어떤 관계이고, 그 관계는 어떤 말법을 통해 어떤 양상으로 그려질까? 『나는 개다』(백희나 / 책읽는곰)와 『동구 관찰』(조원희 / 엔씨문화재단)에서 대표적인 두 경우를 읽을 수 있다.
『나는 개다』에서는 제목이 명백하게 드러내듯이, 개가 자신의 정체성을 천명한다. 그 정체성은 책머리 첫 두 문장과 두 장면에서 이미 못이 박힌다. 한 마리의 개와 세 명의 인간. 자기들은 “그렇게 가족이 되었다”는 것이다. 강아지 구슬이의 “아부지는 인간”이다. 그렇다면 구슬이는 자신을 인간으로 여기는 걸까? 그렇지도 않다. “동네에서 마주치는 개들이 거의 다 내 형제자매일지도 모른다”며 밤마다 그들과 함께 하울링한다. “기억나지 않는다 해도 우리는 가족이니까.” 그리고 할머니와 동동이로 말하자면, 그런 종별 구분이 아예 필요가 없다. 구슬이의 너무나 개다운 표정과 동작, 거기서 읽히는 너무나 인간적인 감정도 동물과 인간의 경계를 잊게 한다. 이 책의 모든 장치는 바로 그 목표를 향한다. 눈앞에는 엄마를 등 뒤에는 동동이를 둔 구슬이는 몸을 돌려 동동이를 향해 뛰고, 침대에 똥 싼 벌로 베란다로 내쫓긴 구슬이 옆에 동동이가 나와 함께 눕는다. 인간과 동물은 그렇게 하나가 된다.
『동구 관찰』에서는 제목이 명백하게 드러내듯이, 한 존재가 다른 존재를 관찰하고 규명해서 보고한다. 인간과 순식간에 완전히 밀착하는 게 개 이야기답다면, 거리와 시간을 두고 골똘히 지켜보는 게 고양이 이야기답다. “동구는 보면 볼수록 웃기게 생겼”고, 잠버릇은 고약하고, “내가 뭐만 하려고 하면 꼭 방해를” 하며, “가끔 이상한 짓을 한다.” 글은 그렇지만, 그림에서 고양이와 아이는 언제나 둘이(거의 둘만) 함께다. 그래서 이 둘 사이가 뭐가 그렇게 특별하다는 거지? 의문이 들 즈음, 깜짝 반전과 함께 모든 상황이 가슴을 훅 친다.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 다시 생각하며 읽게 만든다. 동동이와 구슬이가 함께 있는 것 이상으로 고양이와 아이가 서로에게 스며든 것을 발견하게 한다. 이렇게 확고한 천명과 이렇게 교묘한 연막이라니. 그래도 이 두 이야기가 결국 말하는 바는 같다. 나는 너고, 너는 나라는 것이다.
동물 이야기는 대부분 인간과 그들과의 관계에 관해서, 그들이 비춰주는 인간에 관해서 생각하고 깨닫게 만든다. 그와 함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동물 자체에 관해서 이해하게 하는 책이다. 생태 혹은 환경 그림책이라는 범주로 분류되면서 주로 생물학적 지식을 재미있고 의미 있게 전달하는 목소리를 내는 책. 아무래도 진지하고 단정한 말법을 쓰게 될 것이다. 그런 범주 이외에 개성 있는 시각과 말투를 갖춘 생태 그림책이 있다면, 동물 이해에 또 다른 지평이 열릴 수도 있다. 『새들의 밥상』(이우만 / 보리) 같은 경우다.
자기 집 작은 뒷산에서 거의 60여 종에 가까운 새들을 발견해 보고한 적 있는 작가는 그들이 무엇을 먹고 사는지를 꼼꼼히 관찰해서 기록한 결과를 190여 쪽의 두툼한 책으로 보여준다. 꽃과 풀과 나무에서, 땅과 물과 하늘에서 새들은 온갖 먹을 것을 온갖 방식으로 취한다. 같은 먹이를 두고 다투는 새들의 민첩함과 용감함, 다투지 않고 다른 먹이를 찾아내는 새들의 사려 깊음과 지혜로움이 그 과정에 담긴다. 가문 시기에 민가 난로의 연통에 맺힌 물을 찾아 마시는 새들의 영리함과 바위 팬 자리에 물을 부어주는 인간의 마음 따뜻함도 수놓인다. 정교한 새들의 모양과 예쁜 색깔의 그림에 절로 터지는 탄성은 말할 것도 없다.
이런 책을 읽고 나면 산에서 도토리 한 알도 무심코 주워 담을 수 없다. 벌초를 하면서도 미안한 마음 금하기 어렵다. 이 조롱조롱 까마중이 새들에게는 얼마나 풍성한 식탁이 될 텐데. 하늘에서 낚아채인 참새에게는 연민이, 그 참새를 찢어 새끼에게 먹이는 새호리기에게는 공감이 인다. 먹고사는 일이 얼마나 준엄하면서도 아름다운지, 얼마나 마음 아프면서도 한편 마음 그득할 수 있는지를 새에게서 배운다. 힘주어 가르치지 않으면서도 마음 깊이 배울 수 있게 만드는 말법도 그림책은 이렇게 구사할 수 있다.
김서정_동화작가, 평론가, 번역가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19년 1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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