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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한독서 Apr 12. 2022

어느 늙은 산양 이야기

삶을 마감하는 모두에게

어느 늙은 산양 이야기

고정순 글·그림 / 48쪽 / 14,000원 / 만만한책방



그 많은 동물은 다 어디로 갔을까? 내가 가꾼 텃밭의 푸성귀를 다 먹어 치운 고라니 가족, 집 주변을 어슬렁거리던 고양이들, 나무 위 새들, 마당을 가로질러 가던 뱀, 지금은 어디론가 가고 없다. 떠날 때를 예감하는 생명체는 자기 자리를 찾는다. 그래서 그 많던 자연 속 생명체 흔적이 잘 보이지 않는 이유도 이들이 모두 보이지 않는 어딘가로 떠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마지막 자리가 사람의 눈엔 잘 띄지 않는다. 산속, 강, 들판 천지에 마치 어딘가 숨어버린 듯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도시에 사는 동물이 비정한 아스팔트 도로에서 죽임을 당했을 때는 스스로 택한 죽음과는 다르다. 그들 중 일부를 도구를 써서 흙을 파고 묻은 적이 여러 번 있었지만 무척 힘든 일이었다. 인간처럼 기억해주는 이도, 애도하는 무리도 없고 바치는 꽃도 없이 사라짐을 자주 보아왔다. 


늙은 산양도 산과 들 그리고 강으로 혼자서 마지막이 될 자리를 구하러 나선다. 그런데 강에서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생각이 바뀐다. 집으로 돌아가 다시 생각하기로 하고 이제는 아주 먼 곳으로 떠날 계획을 하며 잠자리에 든다. 다음 날, 그다음 날 또 그다음 날에도 산양은 깨어나지 않고 아주 먼 곳으로 떠난 것처럼 보인다.  



이 그림책에는 처음부터 작가가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고 답을 구하려는 의도가 있다. 젊고 멋졌던 산양에서 이제는 지팡이 없이 걷기도 힘든 나이가 되어 상념에 빠진 주인공 산양을 빌어서. 그렇지만 이 질문은 책 속 여행을 하는 모든 이들에게 던지는 우리의 이야기다. 


검은색 콩테와 먹물로 늙은 산양의 행적을 투박하고 담백하게 그려낸 그림에서 그의 쓸쓸함이 단 몇 줄의 글과 함께 온몸에 전해온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두 멀리 떠나는 일에 대해서 익숙하지 않다. 특히 어린 독자에게는 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림책은 글과 함께 그림이 주요한 기능을 하면서 보는 이에게 감정을 전한다. 꼭 답이 있는 질문은 아니더라도 스스로 생각하게 하는 물음을 화면 곳곳의 큰 여백으로 강렬하게 전달한다. 


전체를 채우지 않은 구도와 흑백 드로잉 그리고 채색으로 산양의 멀고 긴 여행이 무척 고단함을 그대로 보여준다. 우리 그림책에서 삶을 마감하는 일을 독자에게 선보인 것은 이 작품이 처음이다. 어렵고 무거운 이야기를 늙은 산양과 함께 보는 것은 낯설지만 이제 받아들일 때가 되었음을 예고하는 서막이 아닐까. 그래서 이 책은 작가와 출판사 모두에게 힘들고 용기가 필요한 작품이다. 

나와 어린이와 어른 모두 이 산양을 애도하며.


정병규_행복한그림책연구소 소장, 『우리 그림책 작가를 만나다』 저자


이 콘텐츠는 <동네책방동네도서관> 2020년 12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행복한아침독서 www.morningreadi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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