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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한독서 Jun 03. 2022

코끼리 미용실

내 맘대로 하는 유쾌한 상상

코끼리 미용실 

최민지 글·그림 / 56쪽 / 13,000원 / 노란상상



처음 미용실에 갔던 날이 기억나지 않는다. 어릴 때의 나를, 나보다 엄마가 더 많이 기억한다. “엄마, 나 처음 미용실 갔을 때 어땠어?” 물어보니 계속 웃었다고 한다. 엄마의 말을 통해 미용실 의자에 앉은 아이를 떠올린다. 어린 시절 대부분의 기억은 엄마의 대답을 통해 만들어진다. 사진을 보며 떠올리게 되는 장면도 있다. 코끼리 미용실이 더미북이었을 때 사진첩과 일기장을 함께 들여다봤다. “머리 스타일을 고르고 코끼리 코를 하시오!”는 일곱 살 민지체로 적은 것이다. 한 권의 사진첩 속 나는 무척 다양한 머리를 하고 있었다. 허리까지 오는 파마머리였다가, 턱선까지 잘랐다가, 앞머리가 있다 없다 했다. 

그걸 보니 내가 자유로운 아이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억과는 달랐다. 내 기억 속의 아이는 대부분 눈치를 살폈고 초조해했기 때문이다. 착한 아이가 되기 위해 억울한 쪽을 택했다. 원하는 짝꿍을 포기해야 했고 떠들고 춤추는 대신에 반듯하게 앉아있어야 했다.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착한 어린이 상을 타기 위해서 성질을 죽였고 집에 와서 울었다. 그런 내 성격이 싫어서 변하려고 무던히 노력했던 것 같다. 

그런데 머리 스타일만큼은 제멋대로인 게 왠지 위로가 되었다.


코끼리 미용실을 쓰고 그리는 내내 기분이 좋았다. 그림을 그리는 게 재미있기도 했지만 그보다 이야기를 통해 기억이 회복되는 것이 좋았다. 아이인 화자의 말을 통해서, 표정이나 몸짓을 통해서 처음 미용실에 갔던 그날의 감각을 다시 느꼈다. 아이의 마음이 되어 마음껏 놀았다. 잠들기 전에는 다른 아이들이 머리하는 영상을 봤다. 아이들은 설레는 얼굴로 미용실에 갔고 멋진 머리가 되면 기뻐했다. 미용실 가는 걸 끔찍하게 여기는 아이도 있었다. 움직이는 의자와 디자이너의 친절도 소용없었다. 미용실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전부 다른 아이들을 화면으로 보면서 우리 모두가 코끼리 미용실에서 만나는 상상을 했다. 


나는 내가 원하는 머리를 하고 싶다.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는데 여전히 쉽지 않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해야만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게 되거나,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을 거절하지 못하거나, 가기 싫은 곳에 가게 된다. 내가 만나고 싶은 것들만 모아서 코끼리 미용실에 넣었다. 그들을 모두 좋아하지만 그중에서 생쥐가 가장 마음에 든다. 작은데 터프하고 열심히 일하고 잘 놀기 때문이다. 책 속의 책을 펼치면 나오는 다양한 머리 스타일 장면이 마음에 든다. 그리면서 계속 웃음이 나왔다. 나는 내가 소리 내어 웃게 될 때 확신이 든다. 내가 재밌지 않으면 아무도 재미있게 읽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다. 

가장 많이 그린 장면은 코끼리 얼굴이다. 롤러도 물감도 익숙하지 않아서 그림도 옷도 계속 망쳤다. 코끼리를 그리다가 지쳤던 어느 날에는 코끼리 두 마리가 우리 집에 왔다. 편집자님과 친구가 동시에 선물해줘서 신기했고 웃겼고 힘이 났다. 뒤 면지는 가장 마지막에 그렸는데 연필로 선을 긋는 감각이 짜릿하게 느껴졌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선을 하나씩 그었다. 그날의 기분을 오랫동안 기억할 것 같다. 


코끼리 미용실을 작업하면서 미용실에 괜히 자주 갔다. 책이 나오고 나서도 그랬다. 머리를 기르는 중이라 다듬는 것밖에 할 게 없는데도 전보다 자주 갔다. 미용실을 좋아하게 된 것 같다. 미용실 의자에 앉아 거울로 본 나는 불안한 표정이다. 왜 그런지 생각해봤는데 너무 많이 변할까 봐 혹은 너무 많이 변하지 않을까 봐 그런 것 같다. 머리를 맡기는 일에도 용기가 필요하다. 기대하고 뛰어드는 아이처럼 살고 싶다. 완성된 머리를 걱정하기보다는 머리하는 과정을 즐거워하고 싶다. 미용실을 소재로 한 또 다른 이야기가 자꾸만 떠올랐다. 책이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계속 미용실을 생각했고 미용실을 썼다. 아빠가 머리하러 간다고 하면 따라갔다. 코끼리와 미용실을 전보다 더 좋아하게 된 것이 마음에 든다. 나는 조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다.


쓰고 그릴 때 가장 자유롭다. 이 세계 안에서는 마음대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을 수 있다. 마음에 쏙 드는 머리처럼 마음에 드는 장면이 나올 때까지 쓰고 지울 수 있다. 누군가를 맘껏 미워할 수도 있고 사랑할 수도 있다. 그림책을 쓰고 그릴 때, 마음껏 춤추는 기분이 된다. 아주 멀리 갔다가 되돌아오기도 하고 상상하지 못했던 것을 만나거나 예전에 꿨던 꿈을 다시 꾸기도 한다. 처음 보는 곳에 가서 머리를 맡길 수도 있다. 길고 무거운 머리를 자를 수 있고 문어에게 때 좀 밀어달라고 요청할 수 있으며 코끼리의 코에 들려서 하늘을 날 수도 있다. 그림책을 쓰고 그릴 때 어떻게 이런 좋은 세상이 있는지 감탄하게 된다. 여기서 계속 살고 싶다. 마음껏 쓰고 그리고 지울 수 있어서 좋다. 코끼리 미용실의 첫 손님이 나라서 다행이다.



최민지 작가는 서울예술대학교에서 문예창작을 전공했습니다. 『문어 목욕탕』과 『코끼리 미용실』을 쓰고 그렸습니다. 목욕은 매일 하고, 머리는 빨리 자라기를 바라는 중입니다.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19년 8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행복한아침독서 www.morningreadi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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