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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한독서 Aug 19. 2022

반성과 사과, 평화의 메시지 ‘용맹호 씨’를 만나다

딸각! 수류탄 안전핀을 뽑고 빙글용맹호 씨는 오늘도 정비소에 가요.
귀가 셋, 가슴 셋, 눈이 셋, 발이 셋, 부푼 몸으로 파란 하늘 뭉게구름을 아름 속에 품고 가요.
부우부웅… 시내버스가 달려오고 다다다다… 
헬리콥터가 날아가고빙글 땅바닥이 돌아요.   



용맹호

권윤덕 글·그림 / 52쪽 / 17,000원 / 사계절



“세계 곳곳에서 전쟁이 일어난다. 

꽃할머니가 겪은 아픔은 베트남에서도 보스니아에서도 이어졌다. 

그리고 지금 콩고에서도 이라크에서도 되풀이되고 있다.”


2010년에 출간한 그림책 『꽃할머니』의 마지막 글귀다. 글귀 아래 이라크와 베트남 여성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그 작품을 하면서 일본군 ‘위안부’의 아픔에 공감했던 일본 여성들, 세계 여성들의 활동을 알게 되었다. 특히 2000년 도쿄에서 열린 여성국제법정 자료를 읽으면서 한국이 베트남전에서 행한 잘못에 대해 가해국 국민으로서 무언가 해야 하지 않을까, 다음 책으로 베트남에 참전한 한국군 이야기를 해야 『꽃할머니』가 완성되겠구나 생각했다.



2011년, 마침 안양의 보충대리공간 스톤앤워터라는 단체에서 제안이 들어왔다. 베트남에서 한 달 동안 머물 수 있는 아시아 작가 교환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해보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그렇게 그해 7월 20일, 그림 도구를 들고 베트남으로 향했다.

호찌민시에서 택시로 한 시간 정도 거리에 끼롱미술관이 있었다. 미술관, 살림집, 부엌, 식당, 화실, 작업장, 별채 건물이 연못을 가운데 두고 둘러있고 별채 옆으로는 사이공강이 흘렀다. 나는 베트남 전통가옥인 별채에 묵었다. 땅바닥 위에 공간을 띄워 깔린 마루, 대나무로 이은 벽과 천장 때문에 실내는 시원했다. 자연과 그렇게 가까이서 살아보긴 처음이었다. 느닷없이 천장에서 스케치북 위로 떨어지는 도마뱀과 서로 놀란 채 눈을 맞추었고, 조용히 누워있으면 대나무 벽 밖으로 툭툭 꽃송이 떨어지는 소리, 열매 떨어지는 소리, 사이공강을 따라 모래를 싣고 오가는 커다란 화물선의 뱃고동 소리가 들렸다. 마루에 앉아있으면 마당을 스쳐 지나가는 이름 모를 생명들, 세찬 비바람에 떨어질 듯 흔들리던 물먹은 나뭇잎들, 그 잎에 비친 햇살에 붉은 보랏빛이 반짝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주위의 하나하나에 눈높이를 맞추고 귀를 밝게 열어보았다. 모두 다 화폭에 담아보고 싶었다. 호찌민에서의 한 달살이는 새 그림책 『용맹호』에 그대로 녹아들었다.


며칠 전 『한국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의 저자 최혜진 작가가 진행하는 강연이 있었다. 최 작가는 내게 이런 질문을 주었다. “아무리 아픈 이야기라 해도 사건의 배경이나 사회 구조를 들여다보며 질문을 이어가면 결국 인간의 선한 의지와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고, 그 작품을 끝낼 때쯤이면 마음의 상처가 많이 회복된다고 하셨는데, 이번 『용맹호』 작업 과정에서 느낀 ‘인간의 선한 의지와 희망’은 무엇이었는지, 또 개인적으로 ‘회복되었다’라고 느낀 순간은 언제였는지?”

『나무 도장』의 외삼촌이나 『씩스틴』의 씩스틴은 가해자의 위치에 있지만, 그 위치에서 생명을 살리는 선한 의지를 드러내는 존재였다. 그러나 용맹호 씨의 경우, 그가 주인공이라고 해서 ‘착한 참전군인’이 되어서는 안 되었다. 만약 그렇게 묘사한다면 “가해자도 피해자이다”라는 식으로 가해자를 두둔하는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사실로서의 가해 행위, 그 잔혹함을 있었던 그대로 드러내야 가해자가 겪는 트라우마도 사실적으로 느낄 수 있는 법이고, 따라서 용맹호 씨는 민간인 학살과 성폭력 등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인물이어야 했다. 마지막에 용맹호 씨가 쓰러지지만, 반성이나 참회를 하지는 않는다. 그림을 그리는 내내 주인공에게서 내 마음속 상처의 회복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오히려 희망은 베트남전의 성격을 전하는 표지의 아기 엄마, 정글 속에서 싸우는 여성들, 쓰러진 용맹호 씨에게 달려오는 시민들, 인간 세상을 생명으로 보듬는 베트남의 자연에 있었다. 특히 자연을 그리면서 큰 위로를 받았다.


10월 23일, 강원일보가 주최한 토론캠프가 있었다. 참여한 초·중·고교생들의 토론 주제 중 하나가 ‘내가 만약 베트남전의 피해자라면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가는 용맹호 씨를 용서할 수 있을까?’였다. 토론 후 결론을 낼 수는 없었지만 ‘용서할 수 있다’와 ‘용서할 수 없다’는 의견들을 들으면서 나도 학생들도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용맹호 씨가 퇴근길에 과거로 들어가는 그림이 있다. 표지판의 화살표가 왼쪽으로 되어있고 그림 속 여자 행인도 그리로 가고 있다. 그런데 용맹호 씨는 현실과 멀어지는 반대의 길로 걸어가서 결국은 돌아오지 못한다. 그림을 그리면서도 한편으로는 안타까운 마음에, “용맹호! 그쪽으로 가면 30년 넘게 가슴 밑바닥에 눌러놨던 기억과 마주칠 거야. 그냥 왼쪽으로 가. 모른 체해!”라고 외치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가해의 고통이 몸의 증상으로 나타나는 과정을 독자가 공감하길 바랐고, 가혹하게 과거로 용맹호 씨를 밀어넣었다. 용서는 피해자만이 할 수 있다. 우리 사회가 용맹호 씨를 용서할 수 없더라도 그를 공동체 밖으로 밀어내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사회가 가해자라는 낙인을 찍어서 몰아내면 용맹호 씨는 폭력을 만들어낸 단단한 구조 속에 숨어버리고, 끝내 잘못을 시인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용맹호』는 무섭고 끔찍하고 마음 아픈 이야기이다. 우리 사회에서 일어났고 지금도 진행 중이며 앞으로도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이다. 

어른들은 질문한다. 

“이 책을 아이들에게 읽혀도 될까요?” 

아이들은 스스로 판단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 받아들인다. 아이들이 생각하는 힘을 키우도록 어른들이 옆에 있어 주면 좋겠다. 이 책이 우리의 반성과 잘못에 대한 사과로 이어지는, 아시아에 보내는 평화의 노래가 되길 바란다.



권윤덕 작가는 미술을 통해 사회참여 운동을 해오다가 첫 그림책 『만희네 집』을 출간하면서 그림책작가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지은 책으로는 『시리동동 거미동동』 『꽃할머니』 『씩스틴』 등이 있습니다.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21년 12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행복한아침독서 www.morningreadi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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