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
김금숙 글·그림 / 244쪽 / 18,000원 / 딸기책방
유난히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가을 하늘에 한없이 기분이 들뜬 그 날, 몇 달 전부터 취재로 알고 지내던 할머니도 그 높고 푸른 하늘을 한참 올려다보고 계셨다. 반갑게 인사를 드리는데 “오늘은 엄마가 너무 보고 싶다.” 팔순이 넘은 할머니는 어느새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목구멍에서 ‘엄마’라는 말이 목에 걸려 겨우 삼키셨다. 전쟁으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억척스런 어머니의 자리에서 지금껏 힘겹게 참아왔던 그리움을 토해내듯 엄마를 찾는 아이가 속으로 울고 있었다.
자갈치시장에서 55년 넘게 억척스레 살아온 김 할머니는 함경도가 고향인 피난민으로 고향에 어머니를 두고 오셨다. 갓 낳은 첫째 아이를 업고 시댁 식구와 피난을 오면서 어머니와는 영영 이별하게 된 것이다. 말수가 적은 할머니는 힘든 피난 이야기를 하다가도 자식 이야기가 나오면 언제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고 든든해 하셨다. 하지만 그런 든든한 자식들이 있어도, 그렇게 긴 세월이 흘렀어도 쉽게 토해내지 못했던 오랫동안 묵혀둔 그리움이 있었다. 그 어떠한 말로도 위로가 될 수 없기에 한참을 말없이 곁에 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로부터 몇 년이 흘러 다시 찾아갔을 때는 이미 다른 분이 계셨다. 그리고 얼마 전 우연하게 김 할머니의 사진과 함께 이북 할머니 이야기를 하는 자녀분의 인터뷰 기사를 봤다. 김 할머니의 기다림은 이제 끝났다. 몇 년 전 시리고 아팠던 기억도 어느 날 시퍼렇게 멍든 자국이 언제 사라졌는지 모르듯 그렇게 잊혔다. 부끄럽지만 그냥 한번 스쳐지나간 일이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김금숙 작가의 『기다림』을 보며 그때의 기억을 다시 한번 되새기게 되었다. 이 이야기 역시 한국전쟁과 이산가족의 아픔을 다루고 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이산을 겪은 작가 어머니의 아픔을 담은 작품이라 더욱 관심이 갔다.
피란길에 헤어진 언니를 만나고 싶다고, 생사라도 알고 싶다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의 아픈 현대사를 보여준다. 꼼꼼한 취재와 어머니의 생생한 기억을 바탕으로 작가의 힘 있는 필력이 더해져 당시의 아픔을 더욱 명확하고 절실하게, 예리하게 그려내고 있다.
첫 장에 “엄마를 버렸다”라는 문장으로 늙어가는 엄마를 바라보는 딸과 짐이 될 것 같아 두려워하는 어머니의 감정을 예리하게 찌르고 시작한다. 미워하다 다시 미워할 수 없는 엄마의 인생을 딸이 들여다본다.
어머니의 어린 시절, 가난해서 여자라서 배울 수 없었던 설움과 함께 일제강점기 시절 얼굴도 보지 않고 결혼했지만 첫아기가 태어나고 자라던 그 시절의 행복함. 그리고 전쟁으로 피란길에 자식과 남편과 헤어져야 했던 기막힌 이야기, 재혼한 가정에서 엄마를 잃은 남편의 아들을 자신의 아이처럼 극진히 키웠던 이야기, 2018년 21차 이산가족 상봉과 매번 상봉 명단에서 제외되는 안타까운 이야기까지 그 시대의 여자로서 어머니로서 살아온 삶을 작가는 담담하게 풀어놓았다.
주인공이 느꼈을 아픔을 검은 먹선으로 감추고 냉철하게 그려져 있기에 보는 내내 딸로서 때로는 엄마로서 인간으로서 공감하고 가슴 한구석을 송곳으로 꼭꼭 찌르듯 아파하며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다.
통일이 될 때까지 건강하게만 살아있어. 내 걱정은 말고, 우리 꼭 빨리 만나자.
보고 싶다, 우리 아들. (236쪽)
영상 편지 속 어머니의 미소가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어머니는 끝까지 희망을 잃지 않았다. 전쟁이 발발하고 70년이 흘렸지만 기다림은 계속되고 지금도 그 희망을 놓지 않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오래 기다릴 수 없다는 것을 작품을 통해서 더 절실하게 느끼게 된다. 제발 한 분이라도 더 헤어진 가족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몇 년 전 전쟁의 아픔을 모티브로 한 작업을 했었기에 김금숙 작가의 『기다림』에서 느껴지는 아픔은 더 짙고 먹먹하다. 하지만 더욱 분명해지는 건 이 기다림이 언젠가는 끝나겠지만 결코 잊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아픈 과거의 상처는 상처로만 남지 않는다. 전쟁은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된다.
처음 이 책을 받았을 때의 무거움이 한결 편안해진 건 또 다른 희망의 메시지를 보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인터뷰에서
라고 말했다.
작가로서 이렇게 큰 그림을 그리고 작업에 임한다는 점에서, 게다가 아프고 소외된 이들을 조명하려는 작가의 마음이 느껴져서 감사와 박수를 보내고 싶다.
정희선_그림책작가, 『막두』 저자
이 콘텐츠는 <동네책방동네도서관> 2020년 12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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