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곡차곡 쌓은 농촌 마을의 삶과 정서
마을 초입 커다란 도토리나무와 은행나무 아래로 어르신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눕니다. 농사짓고 바글바글 살아온 추억 한 자락, 새소리 바람 소리 사이로 재미난 일도 많습니다. “나는 내가 태어나 자란 우리 마을이 좋아.”
오늘도 마을 어르신들은 정든 마을을 지키며 살아갑니다.
우리 마을이 좋아
김병하 글·그림 / 44쪽 / 12,000원 / 한울림어린이
장독대 앞에 앉아 나물을 다듬는 할머니가 자신이 태어나 자란 마을이 좋다고 합니다. 일곱 살 때부터 밥하고 나물 뜯고 집안일을 도왔으며 스무 살에 결혼해 농사지으면서 자식들과 고생하며 살았답니다. 자꾸만 빈집이 늘어나 서글프지만 그래도 마을에는 재미난 일도 많다 합니다. 소, 닭, 돼지, 강아지, 염소 등 가축도 여럿 키우고, 냇가에서 물고기랑 참게도 잡고, 애써 가꾼 농작물은 들짐승들이 망가뜨리지만 그래도 함께 살아야 하는 관계임을 푸념 섞인 말투로 들려줍니다. 이제는 영감님 먼저 떠나보내고 꽃나무 가꾸는 것이 즐거운 소일거리라며 태어나 자란 이곳에서 마무리를 지으려 한답니다.
『우리 마을이 좋아』는 충남 부여군 송정마을 어르신들이 들려준 이야기들을 모아 정리해 만든 그림책입니다. 그림책미술관시민모임이 주관한 삼 년여에 걸친 마을 사업의 일환으로 만든 그림책 중 한 권입니다. 이 년 동안 마을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꾸준히 수집해 정리했고 그렇게 모은 이야기를 토대로 했습니다.
송정마을의 자연환경도 볼 만합니다. 마을 입구에는 오래된 느티나무와 팽나무, 참나무 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오백 살도 넘은 졸참나무가 아직도 도토리를 맺어 사람과 동물들에게 내어줍니다. 오랜 세월 동안 마을의 식수원이 되어준 우물이 있고, 마을 사람들이 꿈을 키워왔던 야학당이 아직도 건재합니다. 이렇게 한 사람 한 사람이 이웃을 맺고, 사람과 동물이 자연환경 안에 어우러져 마을을 이루며 살아갑니다.
농촌 마을에서 나고 자란 저는 부모님을 도와 이런저런 농사일을 했었습니다. 모내기, 벼 베기, 보리타작, 감자 캐기, 나무하기, 호미질도 해봤습니다. 산과 들을 누비며 자연 속에서 자랐고, 어른이 되어 그림 그리며 사는 지금도 조금이나마 농사지으며 살기를 원해 텃밭 농사를 해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취재차 찾은 이 마을이 무척 예뻐 보였습니다. 마을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면 제 어린 시절 마을 이야기와 유사한 점을 많이 발견할 수 있었고 그래서 더 자연스럽게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취재를 마친 후 마을을 그림책으로 담아내기 위해 여러 구상들을 했습니다. 수차례 취재했지만 외부인인 제 시각은 어떤 지점을 넘어서지 못하고 맴돌기만 했습니다. 결국 마을 주민들의 삶과 이야기로 꾸려가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태어나 자란 곳을 한평생 떠나지 않고 생의 마지막을 이곳에서 정리하려는 어르신들의 마음을 존중하면서, 이를 섬세하고 서정적인 그림으로 확장하고 싶었습니다.
또한 오랜 세월 농사지으며 살아온 제 부모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을 녹였습니다. 어린 시절 부모 곁을 떠나 도시에서 청소년기를 보내고 성인이 되었던 그 시절 시골 출신 학생들이 그랬듯 저 역시 늘 어머니와 고향 마을, 형제들을 그리워했습니다. 그렇게 꾹꾹 눌러왔던 그리움을 이 책에서 애틋하게 풀어냈습니다.
그림책은 전체를 관통하는 시간의 서사 위에 한 장면 한 장면 에피소드를 나열하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차곡차곡 쌓인 각각의 에피소드는 농촌 마을의 기나긴 세월을 담아내고자 했으며, 각 장면의 에피소드를 서정적으로 부각하기 위해 배경을 생략하고 주제와 어울리는 꽃, 곡식, 나물 등을 배치했습니다. 가족 이야기가 나오는 장면에서는 찔레꽃을, 자식을 그리워하는 아버지가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보랏빛 도라지꽃을, 이렇게 상징적인 소재를 함축적으로 배치해 서정의 깊이를 더했습니다.
쇠락해가는 농촌 마을의 풍경과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가급적 화려하고 아름다운 그림으로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주묵(빨간 먹물)과 아크릴 잉크를 주재료로 하고 펜으로 작업했습니다. 날카로운 펜의 치밀한 선으로 섬세하면서도 부드러운 이미지를 연출하고자 했습니다. 격자무늬의 펜 선은 녹록지 않았던 농촌 마을에서의 세월을 씨실과 날실을 촘촘히 엮듯 꾹꾹 눌러 표현한 것입니다.
이 그림책의 배경과 에피소드는 송정마을에서 출발하지만 송정마을의 울타리를 넘어 보편적인 우리네 농촌 마을 이야기입니다. 송정마을 어르신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대부분의 농촌 마을은 도시화의 그늘에 늘 빼앗기면서도 마을을 지켜왔습니다. 이 책이 특히 저처럼 고향을 떠나와 가슴 한 켠에 그리움을 쌓아두고 사는 사람들에게 작은 위로가 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김병하 작가는 오랜 시간 어린이책에 그림을 그렸습니다. 사람과 자연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이야기를 그림으로 담아내려고 노력합니다. 『고라니 텃밭』 『우리 마을이 좋아』를 쓰고 그렸고 『까치 아빠』 『창세가』 『강아지와 염소 새끼』 『수원 화성』 등의 그림책에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 콘텐츠는 <월간그림책> 2018년 6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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