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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드 큐레이터 서윤 Mar 06. 2023

도도한 매력 덩어리 김치

-새콤하게 익은 김치 한보시기만 있으면



김치 하나면 모든 음식이 가능해지는 우리나라!

김치가 없으면 밥을 못 먹는다는 사람도 있고, 외국 여행을 나갈 때도 김치를 꼭 챙겨가는 사람도 있다.

손쉽게 주방을 점령하는 김치는 어느 정도 익었느냐에 따라 맛이 오묘하게 차이가 난다. 집집마다 어떤 젓갈을 썼는지에 따라, 고춧가루가 어느 정도 매운지에 따라  양념 안에 넣는 식재료에 따라 김치맛도 다 다르다. 공장에서 만들어진 시판 김치도 만들어진 시기에 따라 살짝 맛이 다른 걸 보면 자신의 독보적인 자리를 쉽게 내어 주지 않는 김치의 도도함은 어쩌면 한국인에 자부심을 올려주는 음식이지 않을까 싶다.


가끔 방전된 마음을 충전하고 싶을 때 김치볶음밥을 해 먹는다.

송송 썰은 대파로 파기름을 내고 오래 익은 새콤달콤한 신김치와 깍둑썰기한 햄과 양파를 볶다가 고소한 버터 한 조각, 달짝지근한 고추장 한 스푼 넣고 남은 밥을 몽땅 넣어 볶아낸 김치볶음밥!

가끔 아이들이 간단히 만들어 먹기에 가장 만만했던 김치볶음밥은 나의 체력이 바닥나서 드러누울 때마다 큰딸이 자주 만들어 주던 메뉴이기도 하다. 따뜻한 밥을 볶았을 때 밥알이 탱글탱글 살아있다며 전자레인지에 찬밥을 데우는 과정을 꼭 빠트리지 않았다. 큰딸은 김치볶음밥을 먹을 때마다 "역시 맥주는 엄마랑 마셔야 맛있다"면서 부드럽게 올라온 생크림 같은 하얀 거품 가득한 맥주잔을 내밀었다. 어쩌면 감정멀미로 심하게 흔들리고 있는 나를 위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막내아들의 대학 입시 때문에 뉴욕에서 함께 지낼 때에도 제일 먼저 김치 겉절이부터 담갔었다.

적당히 익은 김치와 숭덩숭덩 썰어 넣은 돼지고기를 냄비에 달달 볶다가 쌀뜨물을 붓고 끓여낸 김치찌개를 좋아하는 막내에게 공부하다 짜증을 내거나 지치는 모습을 보일 때면 묵은지를 꺼내 얼큰하게 등갈비 김치찜을 만들어 주곤 했다. 타향에서 묵은지를 구할 수 없어 겉절이를 담가 며칠 바깥에 익혀두고 얼큰하게 김치찌개를 끓여 주면 어느새 땀이 송골송골 맺혀가며 맛있게 밥 두 그릇을 비우고는 했다.


어렸을 때 도시락에 김치 국물이 섞이는 걸 못마땅해하는 어린 딸의 마음을 알아주기라도 하듯이 늘 볶은 김치와 예쁘고 부드러운 노오란 계란말이를 담아주셨던 엄마처럼 어느새 우리 집 냉장고에도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볶은 김치는 아이들 도시락을 쌀 때마다 꼭 담아내는 반찬이 되기도 했다.


노란 단무지와 맛간장으로 볶아낸 어묵 채, 그리고 묵은 김치 씻어 설탕 한 스푼 넣고 기름에 달달 볶아 융단처럼 향긋한 김 한 장 펼치고 뜨끈한 하얀 밥 한 주먹 올려 싸 낸 묵은지 김밥은 급하게 아침밥을 준비할 때 요긴하게 쓰이는 메뉴이기도 했다.


냉장고 속을 차지하던 익은 김치들의 구원투수는 콩나물이다. 시원하고 개운하게 끓여낸 김치 콩나물국 한 그릇은 차갑게 먹어도, 뜨겁게 먹어도 상관없는 두루두루 밥상 위 제일 만만한 국이기도 하다. 김치 하나로도 이렇게 많은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음식이 몇이나 될까? 오늘 저녁엔 냉장고 한편에 자리 잡고 있는 묵은지로 오징어 채 썰고 쪽파 좀 넣어 김치전이나 만들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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