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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료

by 신선경




얼마나 흘렀나. 충전기를 연결하니 부재중 전화 수십 통, 노란색 위로 빨간 숫자가 3자리였다. 거기에는 그녀를 노래 제목처럼 만든 이름도 있었다.

소진은 엄마에게만 간단히 메시지를 보내고 밖으로 나왔다. 여행엔 뭐든 가벼운 게 좋았기에 휴대폰도 그대로 두었다. 대신 들고 나온 맥주 한 캔을 홀짝이며 무거운 모래들을 밟았다. 바다 도시는 해가 져도 캄캄하지 않았고 밤이 깊도록 청춘들은 잠들지 못했다. 소진도 동이 트는 걸 볼까 싶어 한적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얼마 후 낯선 곳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


언젠가 소진이 얘기했었다. 아이를 가지면 한동안 여행하기 쉽지 않으니 여름 바다, 겨울 바다 둘 다 보러 가자고.

'선우야, 나 남해 가보고 싶어. 거기 섬에서 보는 바다가 참 예쁘다더라. 근데 너무 멀지?‘

무박으로 통영은 무리가 있어 부산을 먼저 가자고 했다. 그 흔한 해운대 한 번 못 가봤냐고 서로를 놀리던 날이 봄이었던가. 이렇게 따로 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늦여름 바다는 선우 자신처럼 멋이 없다.


-찾았다...!


바람도 없고 뜨겁지도 않은 어디쯤 그녀가 앉아 있다. 아내를 발견한 순간 선우는 잠시 눈을 감고 감사 기도를 했다. 교회를 중학생 때 이후로 가본 적 없었지만 택시에서 내내 빌었다. 무사히만 있게 해달라고. 그렇다면 자신은 어떻게 돼도 정말 상관없다고. 그 기도를 들었는지 소진은 밤바다보다 차가웠다.


-여보.


소진이 고개를 돌렸다.


-어머님이 걱정 많이 하고 계셔. 휴대폰은 왜 꺼둔 거야?

-배터리 없어서 꺼진 김에 그냥 냅뒀어. 설마 그랬다고 여기까지 온 거야?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고?

여행을 마치면 이혼서류를 보내려 했는데 눈앞에 선우가 나타났다. 그것도 부산에 말이다. 소진은 자신이 꿈을 꾸는 건가 싶었다.


-장모님께 들었지. 많이 걱정하면서 왔는데 다행이다. 보고 싶었어.

-지금에 와서 이러는 거 불편하네. 그동안은 연락 한번 없더니

-핑계겠지만 고민하고 생각하느라 그랬어. 용기가 없어서 못 하겠더라.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려 선우는 침을 꼴깍 삼키고 다시 말을 이었다.


-처음에는 내 상황을 인정하기 싫었고 나중엔 내가 한심했고…

-이제 와서 그런 말 안 듣고 싶어.


소진은 선우 말을 싹둑 잘랐다. 두 눈이 검은 파도와 찰싹거렸다.


-온 김에 얘기할게. 더 이상 긴말 말고 합의 이혼하자.

-전화번호 형 둘만 남기고 지인은 싹 삭제했어. 이것도 싫다면 바로 지울게. 안 만날게.

-그런 건 이제 상관없어졌어. 나도 방해받지 않고 혼자 있으니 정말 편하고 좋았거든. 당신 아니, 선우 너도 시간 낭비 그만하고 편하게 해.

-어떻게 편해. 뭐가 편해? 나는 당신 없으면 모든 게 불편해.

-그럴 리가.

아내의 무표정한 얼굴을 보며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울 때가 아니었다.


-당신 마음을 가장 우선으로 챙겼어야 했는데 미안해. 내가 너무 늦게 깨달았어. 앞으로는 정말 정말 잘할 거야. 당신 말만 들을게!

-맘에 없는 공부 하지 말고 친구들 편하게 만나고 너 하고 싶은 거 해. 연기든 사업이든.

-이제 와서 무슨. 공인중개사 재밌어. 시험 꼭 붙을 거야. 그리고 우리 아이도 어서…

-아이 안 낳을 거야. 평생. 혼자가 편해. 나 때문에 일도 관뒀고 그건 위자료로 생각하고 있어.

-왜 그런 말을 해. 소진아.

-너도 받을 건 받아야지. 생각한 금액 있으면 나중에 법원 가기 전에 얘기해 주고

-그만… 거기까지는 말자.


선우의 목소리가 다시 떨렸다.


-소진아. 정말 헤어지고 싶어?

-응.

-진짜 안 되겠어?

-헤어지고 싶어. 진심으로.

-난 그럴 수 없는데 어쩌지…


깊어 가는 새벽에도 모래 위에는 사람들로 소란스러웠다. 그때 소진은 익숙한 공기가 느껴졌다.


-있잖아. 거실에서 혼자 TV 틀어두고 앉아 있으면 나 빼고 다들 행복해 보여. 저들은 별것도 안 하고 환하게 웃는데 난 웃긴 장면을 봐도 그럴 수가 없어. 눈물까지 나면 내가 너무 초라해지니까 보는 사람 없어도 참는 거야. 근데 언제부터는 그것도 안돼. 부부 사이에 가장 중요한 게 신뢰 아닌가? 이제 우리한테는 그게 없어. 선우야.

-내가 잘못 행동한 거 인정해. 지난주부터는 술도 끊었어. 우리 다시 시작하자. 내가 당신 웃을 수 있게 노력할게.

-아니. 더 산산조각 나기 전에 깨진 그릇은 치워야지.

-고쳐서 쓸 수도 있지!

-지체 말고 버려야 해. 우린 이미 끝이야.

-소진아. 그러지 말고.

-이런 대화 지친다. 돌아가 그만.

-여보. 딱 한 번만! 마지막으로 기회 주면 안 될까?

-이미 충분히 줬다고 생각해. 내가 엄마 집 거쳐서 지연이네 있을 때, 그때는 왔어야지. 나 이렇게 초라하다 못해 당신 없어도 살 수 있을 것 같은 마음 들 때까지 놔두지 말았어야지!


소진은 길지 않은 결혼 생활을 정리하고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그를 좋아하는 마음이 남았는지 모르겠지만 더 이상 믿음이 없었다. 그건 사랑이 아닌 거였다.

생각지 못한 만남에 엉클어져 버린 소진은 한참을 걷다 가 뜨기 전 숙소로 돌아왔다. 샤워 후 쓰러지듯 잠이 들었는데 진동음이 계속 울렸다.


-엄마 벌써 깨신 거야?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되니?!

-피곤해서 한참 잤어. 아까 문자 보냈는데

-어서 서울로 와라.

-알았어! 연락 잘할게. 걱정 마요.

-딸. 놀라지 말고 들어. 유서방이 지금 병원이다.

-왜?

-교통사고가 났는데…

-어디 부러지기라도 한 거야?

-그랬으면 나았을 텐데. 소진아. 운전하지 말고 택시 불러 타. 삼성병원이야.

-엄마, 거짓말이면… 나 진짜 화낸다.


소진은 더 이상 아무 말 못 하고 전화를 끊었다. 위험한 거냐고 생명에 지장은 없냐고는 감히 물을 수 없었다. 남편을 단호하게 내친 자신이 원망스러워 차오르는 눈물도 미웠다.

서울로 가는 400km가 야속했지만 줄어가는 거리와 반대로 두려움은 커졌다.






해뜨기 전의 도로는 차 밖으로 휙휙 바람 소리만 들릴 뿐 고요했다.


-아빠. 안 잤어?

-응. 우리 공주님 잘 가고 있어?

-웅! 나 배 타고 똥~그란 해 볼 거야! 아빠도 같이 보면 좋은데

-그래. 아빠랑은 돌고래 보자! 내일 바로 갈게. 할머니, 할아버지 말씀 잘 듣고 있어.

-웅. 이따가 영상통화해!


빠-------앙-----------


그때 우혁의 휴대폰 너머로 노인의 비명 소리와 경적음이 이어졌고 그보다 더 요란한 천둥번개 소리가 들렸다.


끼!! 이이익-------------

퍽!!! 콰과광쾅!!!!


[ 오늘 새벽 경부고속도로에서 부산으로 향하던 관광버스 한 대가 승용차와 택시를 잇달아 추돌했습니다. 해당 사고의 충격으로 버스는 가드레일을 뚫고 도로 옆 산비탈에 있던 나무 등을 연달아 들이받고 멈췄습니다. 이 사고로 50대 버스기사 A씨를 비롯해 승객 13명 전원이 병원으로 옮겨졌습니다. 승용차에 탑승해 있던 60대 운전자와 3살 아이는 크게 다치고 아이를 품에 안고 있던 50대 여성은 현장에서 사망했습니다. 택시 운전기사 B씨와 30대 유 모 씨는 현재 의식이 없는 상태며 (…) ]



8월 여름,

그날도 태양은 여전히 떠올랐다.






브런치북 {꿈꾸는 가게 2}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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