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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과

by 신선경






-내가 무책임했던 것 같아. 이젠 함께 있자.


사람이 극한에 몰리면 판단이 흐려지는 걸까? 유나는 소리 없는 한숨이 나왔다. 그래도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상대는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기에 뻔뻔하게 굴어야 했다. 남자를 흥분하게 만들면 진짜 오늘 못 돌아갈 것 같았다.


-이게 진짜 오빠가 원하는 거야? 아무런 준비도 없이 도망치는 거?

-도망친 거 아니야. 앞으론 내가 다 알아서 할게. 넌 걱정하지 마.

-아니. 이럴수록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없을 거야. 가게 앞에 CCTV도 찍혔을 거고, 연락 안 되면 오빠나 나나 집에서 찾을 텐데. 무작정 이러는 건 정말 아닌 것 같아.


남자의 행동은 충동적이었다. 계획하지 않았기에 자신이 생각하지 못한 것들이 많았다.


-우선 집으로 돌아가자. 가서 하나씩 해결해. 오빠가 정리할 때까지 기다릴게.


듣기 좋은 말만 하면 속내가 들킬까 봐 빠르게 말을 더했다.


-대신 5년은 너무 길어. 어떤 여자가 그 말을 믿을 수 있겠어?

-나는 모든 걸 깨끗하게 정리할 시간을 생각해서 넉넉하게 말한 거지...

-알아. 그래도 5년은 기다릴 수 있는 시간이 아니야.

-그래서 다른 놈 만난 거야?


남자의 목소리 끝이 갈라졌다. 그의 눈에선 작은 빛도 보이지 않았다. 한동안 유나를 붙잡았던 모습이었다.


-내가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오빠도 알잖아. 결혼한 남자를 내가 아무렇지 않게 만날 수 있겠어?

-그건….

-근데 몇 년씩이나 참고 기다리라니, 그건 진짜 아니잖아.

-그래. 나도 당신 힘든 거 싫어.

-그러니까 빨리 정리해. 얼마나 시간 주면 돼? 나는 바로 가서 끝내면 돼.

-정말 그 자식이랑 헤어질 거야?

-오빠가 있으면 만날 이유가 없지.


주변 공기가 가벼워지고 남자 얼굴에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유나도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단 생각에 마음이 놓였다.


-죄책감에 너무 힘들었어. 그래서 급하게 소개팅도 하고 가게도 그만두려고 한 거야. 화나게 해서 미안해.

-내가 미안해. 당신 여기까지 끌고 오고... 마음에 안 든다.


남자가 유나를 품에 안으며 속삭였다.


-서두를게. 조금만 더 기다려줘.


남자를 안심시키고 집에 돌아가야 했기에 유나는 뿌리치지 않고 참았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는 팔을 풀어 유나의 허리와 얼굴에 가져갔다. 거부할 수 없는 입술은 남자를 받아들였다. 동민을 향한 미안한 마음과 수치심이 끝내 볼 아래로 흘렀다. 그 눈물이 남자는 자신에 대한 진심이라 여겼다.

유나 왼손이 운전자의 손에 꽉 붙들려 있었다. 그래도 머릿속엔 온통 한 사람 생각뿐이었다. 심장에 찌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더디게 가던 시간은 어느새 자정을 훌쩍 넘겼다.


-평소보다 늦어서 부모님 걱정하시는 거 아닐까 모르겠네. 어서 연락드려 봐.


남자는 그제야 휴대폰을 주인에게 돌려줬다. 유나는 전원이 꺼져있는 채로 가방에 넣었다.


-그보다 동민이가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야.

-잘됐네. 만나서 내가 얘기할게.

-뭐 하러. 내가 알아서 할게. 집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서 내려줘.

-그럼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혹시 이상하게 굴면 불러.

-집에 가족들도 있고 괜찮아. 걱정 말고 가 있어. 언니 기다릴 텐데.

-너랑은 우리 얘기만 했으면 좋겠어.

-응. 알겠어.

유나의 집골목 초입에 차를 세웠다.


-들어가서 바로 메시지 하고.


반쯤 열린 창으로 애틋함이 흘렀다. 유나를 흔들던 눈빛이었지만 이제 동요하지 않았다. 땅을 딛은 다리에 힘이 풀렸다. 빨리 남자의 시선을 벗어나기 위해 적당히 속도를 내어 걸었다.

집에 가까워지자 걸음은 느려졌다. 동민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가게를 진작 그만두지 못한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완벽히 정리하고 시작하지 못한 게 후회스러웠다. 모든 게 밝혀져도 가게에서 동민이를 기다릴걸 서러움이 북받쳤다. 벌을 받고 있다는 생각까지 닿자 유나는 결국 발이 묶였다. 이대로 땅으로 꺼져도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몇 걸음 앞에 그가 있었다.






계속-

매주 화, 수요일 밤에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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