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이제 어디로 간담.
소진은 지연의 집에서 짐을 챙겨 차에 실었다. 막상 자유시간이 주어지니 어색했다. 결혼하고는 더욱 집과 가게만 오갔었다.
[ 소진아~~ 너 있던 방 그대로 둘 거니까 언제든 들어와~ 혼자 있으려니 벌써 허전하다. 전화 잘 받아! 안 그럼 S씨에게 먼저 신고할거임^^ ] -쪄니♡
[ 도착하면 바로 연락해 멀리 가지는 말고 딸 사랑한다 ] -맘♡
1년쯤 지나면 편해지려나.
서류 정리도 안 된 지금은 엄마 집도 친구 집도 편하지 않았다. 선우와 마주칠지 몰라 집으로도 갈 수 없었다.
오랜만에 내비게이션을 열었다. 혼자서 여행하는 게 얼마 만이지? 이게 여행이라 할 수 있는지도 몰랐지만 소진은 무거운 감정을 덜어내기로 했다.
-그래. 이혼이 별거냐.
나 아직 만 20대 아님? 젊음을 낭비 말고 가보자! 소진은 혼잣말과 생각을 섞어가며 손가락을 움직였다.
'해운대해수욕장 4시간 37분'
어둑한 가게 가장 안쪽 자리에서 선우는 휴대폰 화면과 20분째 마주하고 있었다.
소진의 연락처를 띄우고 자음과 모음을 눌러 써보는 네 글자. 며칠 동안 그랬듯 오늘도 주인에게 전해지지는 못하려나 보다.
누군가 선우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 그의 앞에 앉았다.
-선우야. 일찍 왔네.
-형! 어서 와.
-오랜만이네. 동민이는 좀 전에 못 온다고 전화 왔어. 요즘 연애하는 모양이야.
-여전히 잘 지내네.
-응. 근데 어디 아픈 거 아니지? 살이 왜 이리 빠졌어.
-그런 건 아니고. 며칠 잠을 좀 못 자서 그런가 봐.
-서른은 20대랑 다르더라. 건강 챙겨라. 선우 넌 가장이잖냐.
-응. 그래야지.
특별히 걱정 없이 사는 성격의 선우였다. 아내와 별거 당시에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그러나 소진과 가게에서 만난 이후 잠도 잘 안 오고 입맛도 없었다.
두 사람 앞에 빨갛게 버무려진 골뱅이무침과 치즈가 올려진 감자튀김, 수북한 먹태까지 놓였다.
-선우야 많이 좀 먹어. 오늘 너 배불리 먹는 거 봐야 집에 편히 갈 수 있을 것 같다. 술은 일부러 안 마시는 거야?
-응. 시험도 얼마 안 남았고 이참에 끊어보려고.
-멋지네. 내 동생!
생맥주잔과 콜라 컵이 둔탁하게 부딪쳤다.
-공부하느라 힘들진 않고?
-나름 재밌어.
-그럼 다행이고. 넌 사교성 좋으니까 그 일도 잘 맞을 거야.
-성격이야 형이 차분하고 좋지. 나는 실속이 없어. 인생을 헛살았어.
-왜 이래? 자신감 하면 안 빠지는 놈이.
-그보다 형 고마워.
-뭐가?
-저번에 돈 빌려달라고 했던 거 말이야.
-그래. 지금이라도 필요하면 말해.
-아니야. 돈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뭐 좀 확인하려고 여러 명한테 동시에 보냈어.
상현은 먹태를 마요네즈에 푹 찍으며 깊은 눈으로 선우 얘기에 집중했다.
-그런데 몇 명이나 연락 온 줄 알아? 딱 두 명. 그나마도 형만 계좌를 물어보더라.
-그날 밤새 촬영하느라 새벽에 문자 보고 놀랐어. 잘 해결했다길래 그런가 보다 했더니.
-자신 있게 보냈는데 결과가 처참했지. 형 아니었으면 밤새 좌절했을 거야.
-그런 걸 왜 한 건데?
-인맥 테스트를 가장한 호구 테스트였어. 형도 알겠지만 내가 사람을 너무 좋아하잖아. 그날 이후로 충격받고 아무도 안 만났어. 오늘 형이 처음이네.
-우리 나이 되면 하나씩 가려지긴 하지. 시간을 두고 자연스럽게 멀어졌어도 좋았을 텐데 몰아서 겪느라 힘들었겠다.
-형. 사실은... 소진이가 이혼하재.
상현이 손에 잡혀 있던 먹태를 접시에 내려두었다.
-이유는?
-별거 중이었거든. 남들이 이용하는 걸 모르고 나 혼자 미련하게 군다고 화나서 장모님 댁으로 갔어. 바로 가서 데리고 왔어야 하는데. 그때는 내가 뭘 잘못했나 싶더라.
결혼하고 1년이 선우에게 필름처럼 지나갔다. 데이지꽃 같았던 소진이 자신을 만나 시들어버린 것 같았다.
-화해하려고 만나자고 한 날에도, 내가 딴사람 챙기다 바람 맞혔어. 결국 소진이 말이 다 맞았는데 그땐 몰랐지. 그저께 장모님도 만났는데 이혼이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고 하셨어. 그런데도 용기가 안 나더라. 처음에는 자존심 상하고 나중엔 나한테 화가 났는데도 말이야. 자신이 없다. 형.
경제활동도 안 하고 수백 개의 연락처까지 지우면서 선우는 자신이 부정당하는 것 같았다. 부족한 점 없는 소진 앞에선 더욱 납작해져 아내에게 전화도 못 하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믿었던 사람들에게 상처받았으니 그럴 수 있지. 앞으로 계속 겪을 일이지만 매번 또 아프긴 해. 그래도 선우야. 내일은 꼭 제수씨 만나라. 솔직하게 얘기하고 풀어가야지.
-만나는 줄까? 이미 질려버리지 않았을까...
-이대로 헤어지고 편하게 혼자 살 생각이야?
-소진이 없으면 잘 살 이유도 없어.
-그럼 싹싹 빌어야지. 시간은 필요할 테지만, 넌 분명히 극복해 나갈 수 있어. 여린 구석이 있지만 리더십도 있고. 내 동생만큼 믿는 놈이야, 너.
무언가를 줄 때는 선우를 찾던 사람은 많았다. 언제나 곁에 있어줄 거라 의심하지 않았던 아내마저 떠나가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했다. 이제는 자신을 믿어주는 친구 하나면 되었다. 그리고 한 여자가 필요했다. 선우의 눈에서 소진이 뚝하고 떨어졌다.
계속-
매주 화, 수요일 밤에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