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은 회색커튼에 가려졌어도 바람 없는 포근한 11월이었다.
-누나, 오늘 한가한데 그만 들어가세요.
-오면 같이 갈게요.
-아! 오늘 금요일이죠?
그녀의 어깨가 으쓱하며 양쪽 입꼬리도 올라갔다.
-이 먼 곳을 매주 다녀가시는 것 보면... 형님은 누나가 요정으로 변할까 봐 불안한가?
-와... 카이 그런 농담하는 거 처음 듣네. 오늘 일기에 적어야지.
화연이 이곳에서 일한 지도 2개월이 다 되어 갔다.
지난여름, 새로 시작한 소설의 영감을 얻겠다고 숲을 찾아 들었다. 특별히 정하지 않은 여행지에서 발견한 가게, 카페 '산'
더운 날에 바닷가는 더 뜨거웠고 그늘을 찾아 앉을 만한 곳을 찾다가 30분이나 강제 등산을 했다. 들고 온 생수병이 다 식어서 내려가려던 때, 전구들과 나무판자로 세운 간판이 화연을 반겼다.
인적이 드문 시골 산이었지만 고불고불하고 좁은 길을 오르면 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는 자리에 있었다.
'나무들을 잘라낸 걸까?'
정상도 아닌데 어쩜 여기만 이렇게 뻥 뚫려있는지 신기했다.
가게 안은 생각보다 넓었다. 화연은 복숭아 아이스티로 열을 식히고 수제 팥빙수로 배도 채웠지만, 빈 노트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1시간 동안 딱 다섯 글자를 적었다.
‘언제 오려나.’
이후로 차가운 아메리카노를 한잔 더 마시며 ‘가을바람을 기다린다’고 쓰다 말고 그에게 편지를 썼다.
화연은 일주일 내내 운동 삼아 산으로 갔고 주인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다가 얼마간만 일하기로 했다.
-다리가 멀쩡할 때 한 번은 떠나보고 싶어요.
주인은 60대 후반의 부부였다. 젊은 날엔 먹고살기 바쁘단 핑계로 여행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했다. 환갑이 지나며 형제들과 크루즈여행 회비를 모으고 있었지만 가게가 걱정이었다. 그때 화연이 나타난 것이다.
카페엔 카이가 있었고 기술적인 건 그가 다 했기에 화연은 눈치껏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됐다. 마침 놀기만 하는 것도 신나지 않으려던 참이었다. 무엇보다 산이 마음에 들었다.
가게는 평일에 한산했지만, 주말이면 어떻게들 알고 오는지, 창고에 있는 노란색 플라스틱 의자들을 가게 앞에 꺼내둬야 했다. 화연이 블로그에 올려서 인기가 많아졌나?
카이는 가게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사장의 아들인가 싶었는데 일한 지 2년이 넘은 직원이었다. 가끔 시내를 다녀오는 것 외에는 어디 가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카이는 잘 웃지만 또 한참을 웃지 않았다. 형제에 대해 물은 적이 있는데 어릴 적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친척 집에서 자랐다고 했다.
-혹시 고향은 어디예요?
-서울이에요.
-어머, 정말?
-내가 좀 시골스럽죠?
그는 티 없이 웃어 보였다.
-아니요. 영어 이름을 쓰길래. 본명이 촌스러워서 그런가 했죠.
-시안이에요.
-이름이요? 성은?
그는 또 웃어 보였지만 아까와는 다른 눈 모양을 했다.
-곤란하면 대답하지 않아도 돼요!
-이 요.
-이시안. 이름 예쁘네요! 도자기 같은 피부에 잘 어울려요.
-어어. 눈 온다.
-정말?!
창밖으로 보송보송한 솜 눈이 날리고 있었다.
-와... 오늘 진짜 손님 없겠어요, 누나.
카이는 갈아둔 원두를 보며 얕은 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빗자루를 꺼내러 뒤쪽 창고로 들어갔다.
화연은 카운터에 턱을 괴었다. 자신도 깨끗하고 가벼운 눈이 되어 춤을 추고 싶었다. 그러다 문득 눈길을 걸어올 그가 걱정이었다. 휴대폰으로 신호음이 들리자 묵직한 나무 문이 삐거덕 소리를 냈다.
-화연아, 밖에 눈 와!
-혹시 못올까 전화하고 있었는데. 올라 올 때 괜찮았어?
-응. 더 오기 전에 바로 내려가자.
-그래! 배고프다.
-당신 좋아하는 거기 갈까?
-오늘은 고기 안 당겨. 눈 오는 날에는 치킨이지!
-하하하 그래! 막걸리랑.
-옳지.
세상은 온통 회색 옷을 입었는데 하얀 결정들이 눈부셨다. 그의 품에 안겨 어둑해진 숲을 걸으며 그녀는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꿈이라면 빨리 깨버리는 게 나을까?' 화연은 용기를 냈다.
-올해는 눈이 많이 오려나?
꿈일지라도 혼자 말하는 것이 아니라면 괜찮았다. 작년 겨울은 지독히도 서린 날뿐이었다.
-첫눈이야. 예쁘다 화연아.
그를 다시 만난 건, 지난여름 병원에서였다.
계속-
매주 화, 수요일 밤에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