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는 계절마다 여인네가 치장하듯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추억과 사랑과 아련함, 시원함, 두려움과 공포, 때로는 기다림과 축복으로 나의 감성과 만난다.
트랜스포머처럼 변화무쌍한 폭풍우가 휘몰아치기도 하지만 이때 느끼는 두려움과 공포는 왠지 인간의 교만과 거짓을 꾸짖는 듯하여 겸손해지기도 한다.
여하튼, 비는 우리가 느낄 수 있는 삶의 여러 감정을 멋대로 안겨주고 흔적 없이 사라진다.
어떤 비는 우산 없이 맞으며 걷는 것이 더없이 좋고, 또 어떤 비는 바라보는 것만으로 너무 좋다. 안개비보다는 조금 굵고 이슬비보다는 조금 가늘게 내리는 비를 ‘는개’라고 한다. 나는 는개를 좋아한다. 아니 는개를 맞으며 걷는 것이 좋다.
"는개"에 옷을 흠뻑 적시지 않아서 좋기도 하거니와 얼굴에 와 닿는 간지러운 촉감이 너무도 좋다. 추운 날씨보다는 따스한 날에 만날 수 있어 좋거니와 거추장스러운 우산을 챙기지 않아서 좋다. "는개" 속에 걷다 보면 빗소리가 시끄럽지 않아서 좋고, 도로를 따라서 걸을 때 지나치는 차의 먼지를 진정시킬 정도여서 좋다. 완연한 봄이나 초가을에 만나는 경우에는 더욱더 마음속에 들어와 박힌다.
꽃비는 마치 꽃잎이 흩뿌려내려 오듯 가볍게 내리는 비를 말하지만 꽃비는 은유적 표현인 걸까? 난 아직 꽃비를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벚꽃이 눈이나 비처럼 내리는 광경이 아니라 비가 벚꽃처럼 흩뿌려 내려오는 광경도 꼭 한번 보고 싶다.
여름날 비 내리는 바닷가에 가본 적이 있는가?
남해 어느 바다가 커피숍 창가 자리에서 카푸치노 한잔을 가급적 모양새 있게 들고, 비에 흠뻑 젖는 바다를 감상하는 것은 더없이 큰 행복일 것이다.
장대처럼 굵고 거세게 쏟아지는 "작달비"를 바라볼 때의 후련함을 느낀 적이 있는가?
최근에 차고 문을 열어두고 한참을 차고에 앉아 쏟아붓는 장대비를 구경했다. 속이 후련하기 그지없었다. 이 후련함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사실,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눈으로 느끼는 행복보다 소리로 다가오는 행복이 더욱 크다. 빗소리에 자세히 귀를 기울이면 랜덤 하고 불규칙스러운 소음처럼 들리지만 이내 편안함을 가져다준다.
빗소리가 집중력과 불면증에 좋다는 것을 입증하려는 연구가 많은 것을 보면 비는 참으로 묘한 힘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빗소리는 일상에서 느낄 수 있는 나의 소중한 행복이고 위안이다.
마음을 열어 느낄 수만 있다면 눈 뜨고 사는 것이 행복인 것이다.
때로, 비는 무지개를 선물로 남기기도 한다.
빗소리는 확률적으로 랜덤(Random)한 소음이라 화이트 노이즈(WhiteNoise)**로 분류할 수 있다. 따라서 화이트 노이즈를 인위적으로 재생시키는 장치를 집중력 향상과 불면증에 사용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