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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Y Chun Mar 18. 2021

세월이 알려준 음식의 진미

공감과 선택

어려서 먹었던 음식 가운데 어른이 되어도 생각나는 추억의 음식이 누구에게나 한 가지쯤은 있을 것이다. 내게 남아있는 추억의 음식은 라면이다. 어린 시절 한동안 머물던 외할머니 댁은 시골이라 처음 삼양라면이 출시되고 몇 년쯤 지나서야 소식을 접했다. 마을 사람들 사이에 힘들여 밀가루 반죽을 하지 않고도 편하게 먹을 수 있는 맛있고 이상한 국수(?)가 새로 나왔다는 소문이 큰 이슈였다.


그리고 얼마 후 장에 다녀오시던 할아버지 손에서 세련된 주황색 비닐 포장지를 입고 나타난 라면과 처음 마주했던 기억이 난다.   


평소 같으면 장에 다녀오시는 할아버지 손에 신문지로 둘둘 포장된 돼지고기 한근이 쥐어있거나, 생선 몇 마리를 새끼줄에 매달아 들고 오셨는데 그날은 할아버지께서 라면을 들고 오셨다. 지금도 궁금한 것은 당시 할아버지는 남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청각장애를 가지신 분인데 TV도 없던 시골에서 마을 사람들 사이에 가장 큰 이슈가 된 라면의 정보를 어디서 얻고 사 오셨는지는 아직도 모를 일이다.


쌀이 귀했던 시절, 수제비 같은 밀가루 음식으로 종종 끼니를 해결하던 때에 닭고기 수프로 무장한 신기한 음식의 등장은 맛보다는 호기심이 가득했지만 이 호기심은 순박했던 나의 오감을 이내 황홀한 맛의 세계로 가두고 말았다. 저녁시간에 할머니는 라면 요리하는 법을 마을 사람에게 물어 큰 밥솥에 국수와 라면 한 봉지를 함께 넣어 4인분을 만들어 내셨다.


국수가 가득한 밥솥에서 꼬불꼬불하게 꼬여 있는 이상한 국수를 골라서 손자에게 넘기시던 할머님 생각이 난다. 이후 나는 라면의 포로가 되어 할머니가 시키는 어떤 일이든 순한 소처럼 대꾸하지 않고 처리하곤 했다. 한 봉지에 10 원하는 라면을 또 먹기 위해서..


하지만 세월이 흘러 나의 입맛이 변한 것일까? 요즘 난 인스턴트 음식인 라면을 좋아하지 않는다. 분명 라면의 맛은 그때 그 시절에 비해 훨씬 보완되고 좋아졌음이 틀림없을 지언데 말이다.




그러고 보면 예전에는 몰랐던 음식의 진정한 맛은 세월이 일깨워주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과거, 점심시간마다 식사 멤버가 삼삼오오 모이면 그날의 메뉴를 정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던 기억이 난다. 찌게나 탕 종류의 음식을 즐기는 사람과 고기류를 좋아하는 사람, 면 종류의 음식을 원하는 사람 등 입맛이 서로 다른 몇몇이 모일 때면 누군가는 하루의 즐거움 하나를 양보해야 하는 경우가 종 종 있다. 그렇다 보니 내가 함께했던 점심 멤버들 사이에서는 주장이 강해서 메뉴를 정하는데 결정적 기여를 한 사람한테 점심값 계산의 우선권(?)을 주는 불문율이 생기기도 했다.


퇴직하고 해외에 살면서 깨닫게 된 것인데 당시에는 맛있게 먹었던 음식점의 메뉴 중에는 그립거나 생각나는 음식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더불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음식이 존재하지만 막상 맛있는 뭔가를 먹고 싶어 고르려 하면 딱히 떠오르는 게 별로 없다.

또한, 좋아하는 음식을 꼽아보아도 몇 가지 되지 않는다.


요즘은 마늘, 파(양파), 두부, 미역, 무, 감자, 고추, 깻잎, 봄동, 쑥..    뭐 대충 이런 종류의 것들이 너무 맛있다. 사실 젊은 시절에는 이런 음식이 나를 만족시켰던 적은 결코 없었는데 말이다.


잘 발효된 고추장이나 된장에 찍어먹는 마늘, 고추는 입맛을 돌게 하고 생각만 해도 입에 침이 고인다.  그 시절 농사일에 바쁘고 형편이 어려웠던 전후 세대에게는 가장 요긴했을 반찬이었고 다른 음식을 만들기 위해 농번기의 바쁜 시간을 허비하지 않아도 되거니와 무엇보다도 돈을 들이지 않아도 밥 한 끼를 거뜬히 해치울 수 있어 좋았을 것이다. 특히, 백 야드에서 기른 깻잎과 미나리를 따서 잘 혼합된 양념장에 조리한 것과, 파릇한 파김치, 조개 넣은 미역국, 쑥국은 세월이 가면 갈수록 내게는 매번 더욱 큰 기쁨을 전해주는 음식의 진미가 되어간다.


또한, 과자를 구하기 힘들었던 시절에 콩은 간식을 대신했고, 콩 볶는 고소한 냄새는 아직도 남아있는 달콤한 추억이다.



고추와 마늘, 양파, 콩이 우리의 음식문화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스레 느끼게 되는 것은 무슨 동기가 있어서는 아니다. 나이가 들고 세월이 지나며, 아내가 해주는 음식을 먹다 보니 자연스럽게 알게 된 것일 게다.


젊은 시절에는 아내가 차려준 밥상에 담긴 정성과 고마움을 몰랐던 것도 사실이다. 나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남자들은 그랬을 것이다.

맛을 낸다는 것!

그것은 참으로 어려운 문제인 듯하다. 많은 시행착오와 경험이 쌓이거나 전수되어 완성되는 것이다. 세월이 지날수록 우리는 엄마의 손맛이 그리워지는 세대다. 그러나 우리 다음 세대는 엄마의 손 맛보다 피자나 칙폴레 같은 것을 더 그리워할지도 모른다.


우리 아이들도 음식을 차리는 아내의 손길에 고마움을 느끼고, 세월이 지나서 우리 음식에서 만날 수 있는 깊은 맛을 구별하고, 그 중요성을 깨닫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사실 어린 시절 내 기억 속의 장맛은 모두 짜고 냄새가 강해서 왜 이런 맛없는 음식을 만드는데 어른들이 그렇게 공을 들이는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가끔 한국을 다녀올 때면 지인들이 고추장이나 된장을 챙겨주곤 한다. 물론 미국의 한인마켓에는 다양한 종류의 고추장 된장을 비롯한 한국 식료품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거절하지 않고 고맙게 챙겨 오곤 한다. 마켓에서 파는 것과 지인들이 정성 들여 직접 담근 장은 확실이 그 맛의 깊이가 다르기 때문이다.


음식의 맛은 장맛이라고 하며 맛있는 장 맛을 얻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던 부모님의 수고를 비로소 이해하게 된 것과 음식을 준비하는 아내의 손길이 고마운 것은 세월이 깨우쳐준 조용한 가르침이다.

깊고 깊은 음식의 참 맛을 발견하며 요즘 삶의 또 다른 기쁨이 조용히 나한테 찾아온 것이다. 더불어  나이가 들어가며 내가 느끼는 음식의 맛도 깊어간다. 이 깊은 맛을 깨닫기까지 참 오랜 세월이 걸린 것이다.


감각기관이 느끼는 오감의 맛과 추억과 사연으로 느끼는 상상의 맛이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하나의 음식을 두고 맛있다고 말하더라도 맛의 깊이는 서로 다를 것이다.


최고 진미의 음식 맛은 생리적 오감이 느끼는 것에 더해 그 사람의 감성과 세월의 추억이 가미된 것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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