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손발이 준 선물
“어때 이제 만족이 되나?”
인사 관리팀을 겸직으로 하셨던 팀장님께서는 나와 같이 일하게 될 여직원의 근무조건까지 임시직으로 개선해 주시며 그곳에서 나와 함께 일할 기회를 주셨다.
내가 근무하게 되었던 그곳은 사무실이라고 하기에는 어두컴컴하고 회사에서 동떨어진 무인도 같았다. 나는 행정 업무를 하다가 생각지 못한 서비스 업무를 일하게 되었고 본부에서 실무로 투입되어 잘리지 않고 계속 일하게 되었다. 부모님은 좋아하셨지만 한편으로는 나는 부담스러웠다.
그때는 그게 나를 위한 팀장님의 배려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2년 동안 일했었던 사무실의 생활은 비장애인들과의 어울림 속에서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뇌병변장애는 인지나 반응속도가 느리다. 그래서 난 늘 팀원들과 대화할 때 어려움이 있었고 대화 속 내용도 크게 공감 가지 못했다. 업무도 자율학습이었기 때문에 소통의 부재가 많이 느껴졌다.
또 뇌전증 증상으로 약을 먹은 지 오래되다 보니 부작용이 생겨 소화 기능이 좋지 않았다. 심할 때는 헛구역질과 가슴을 두들기는 예도 있었다. 음식을 잘 먹어 뚱뚱했던 나의 어린 시절은 먹으면 안 되는 음식들이 늘어났고 천천히 식사를 해야 했다. 그래서 팀원들과 매일 식사를 해야 하는 자리에서는 부담스럽고 힘들었다. 뿐만 아니라 식판을 들고 올 때도 오른쪽의 감각이 둔하고 힘이 떨어져 갖고 오다가 옷에 흘리거나 떨어뜨리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그래서 왼손에 힘이 더 많이 가고 경직된 상태가 되었다.
타자를 할 때도 서류를 들 때도 여러 가지 업무 활동은 에너지 소모를 더 많이 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그렇게 내 왼손은 쉴 수 없이 계속 일하고 있었다. 그것이 나중에 문제 된다는 걸 알지 못한 채 말이다. 그래도 운동을 해야겠다는 생각도 든 적이 있어 오른손을 스스로 사용해 본 적이 있다. 그런데 회사에서는 오른손을 사용하면 도움이 아닌 오히려 왼손이 해야 하는 일이 더 많이 생겼다. 그래서 결국 왼손을 사용해야 했었다.
회사에서는 그 모든 것들을 배려받을 수 없다는 걸 알았었고 또 나만 아는 불편함과 회사에서 장애인으로 채용되어 근무한 직원들도 있었기 때문에 장애가 있는 게 특별하지 않았다. 눈에 띄거나 힘들 것 같은 도움은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회생활을 하면서 많은 도움을 바라는 건 나의 욕심이었기에 나는 직장 생활 동안 나 스스로 할 수 있는 법을 많이 배웠다.
그래서 발령이 난 후 내일만 하고 퇴근하면 된다는 장점이 좋아 여기서 여유롭게 개인 시간을 보내고 공부를 해 보자는 마음으로 조금만 더 버텨 보기로 마음을 바꿨다. 그렇게 홀로 있는 여직원에게 업무를 배워가며 시간이 흘러 이제 나도 내 생활을 즐기며 여유를 가질 수 있겠다고 생각할 때쯤 내 생각을 또 빗나가는 일들이 일어났다.
6개월쯤 시간이 흘러 이제 적응할 만해서 한숨 돌릴 그 시점쯤 사무실 직원이 내려오더니 업무를 하나 더 챙겨줬다. 나는 그 업무를 준 것에 대해서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팀장님이 오셔서 그 업무도 감당하라고 하셨다. 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 업무도 감당하기로 마음을 먹고 주어진 모든 일들을 다 했다. 그렇게 업무를 받았고 여기서 다시는 폭풍은 없을 거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날 이후 나는 점점 구렁텅이에 빠지고 있었다. 직원들과 교류가 적어 나쁘진 않았지만 단둘이 일했던 둘만의 공간은 생각보다 감수해야 하는 것들이 많았다.
그때 아버지가 매우 그리웠었다. 홀로 외국에 가족을 위하여 삼십 평생 묵묵히 일하시는 아버지를 생각하며 사회라는 곳의 냉정함도 많이 느꼈고 냉정하게 말했던 아버지 마음이 이해가 되며 새삼 존경스러웠다. 그런 아버지를 생각하며 이 고독한 생활을 버티며 사회생활에 대해 심도 있는 고민을 갖게 되었다.
그래도 동료와 잘 지내고 업무를 무사히 잘 끝마치면 괜찮을 거라 나 스스로 나의 마음을 위로하였었다.
그러나 두 번째 직원을 만나는 순간부터 나의 고난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