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1 정서진에서 마포

39.21km 53,888걸음 06:01~16:25

by 하란


첫날 인천 정서진에서 서울 마포(광흥창역)까지 39.21km 53,888걸음 06:01~16:25


인천 정서진

반년만에 다시 정서진에 섰다.

조금 덜한 설렘과 두려움. 약간의 덤덤함.

종주 때처럼 시끌벅적하게 출발을 기념해주던 지인들도 없고, 날씨는 조금 더 흐리다.

옆에서 활기차게 출발을 준비하는 라이더 일행분께 부탁해, 언제나 그렇듯 어색한 모습으로 인증숏을 찍고 걸음을 시작한다. 잔뜩 낀 안개에 약간 졸아있는데 세상 멸망이라도 온 듯 큰 사이렌과 ‘안개 주의’ ‘안개 주의’ 기계음성의 경고음이 울려 퍼진다.

가지 말란 하늘의 계시인가. 하는 쓸데없는 생각도 잠시, 선천적 그리고 후천적 노력 부족형의 길치인 나는 한 번 가본, 그리고 별다른 길이 있을 법하지도 않은 자전거 도로를 손 안의 네이버 지도를 살펴 가며 걷느라 분주하고 그렇게 걷다 보니 곧 사이렌 소리를 벗어나 부두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물류창고가 가득한 길로 들어섰다. 이제야 어둡던 하늘이 좀 밝은 빛을 내기 시작하고 내 맘에도 주위를 둘러볼 여유가 생긴다. 그리고 자전거길이 여기저기 사방팔방으로 뻗어 나고 청운교에 이르러 아라뱃길 북로와 남로로 나뉘는 것도 인지했다. 부산을 갈 때 이 쪽 길을 아는 지인의 꽁무니만 쫓다 보니 미처 보지 못한 것들이다.

잠시 고민하다 청운교로 들어섰다. 북로로 가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유는 그저 안 가봤으니까.

찻길에 사람길이 밀려버린 지금은 그나마 차와 사람 그사이 어디쯤일지도 모를 자전거길을 의지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양평까진 아예 경로가 겹치고 그다음도 고민의 대상이었다. 그 속에서 새로운 길을 찾으려는 나의 시도는 북로. 같은 길을 좀 다르게 걸어 보자 였다.

청운교에서 바라본 아라뱃길

청운교는 높았고, 그곳에서 보는 안개 낀 아라뱃길의 풍경도 좋았다. 사진을 찍느라 발걸음은 느려졌고 약간 오버된 기분에 그랬을까. 다리를 다 건너고 나서 이정표를 발견하지 못해_지금 생각해도 어떤 표지판도 없었던 듯_ 그저 경험상 다리를 돌아 강변으로 가면 길이 이어져 있으려니 하는 생각으로 옆으로 씽씽 달리는 화물차를 피하며 강변 방향으로 걷는다. 그렇지. 자전거길이 있다. 저 철창 너머에...

좀 가다 보면 진입로가 있으려니 하는 생각에 좀 걸었다. 인도도 갓길도 없는 2차선 도로에 화물차들이 쉴 새 없이 다닌다. 자전거길과 철창 그리고 도로 사이의 녹지를 조심스레 걸어가다 철창을 넘을까 고민도 몇 번, 하지만 넘기도 쉽지 않아 보이고 곧 연결될 거야란 헛된 믿음에 계속 전진했지만 곧 녹지도 풀이 너무 우거져 걷기가 어려워졌다. 어쩔 수 없이 약간의 위험을 무릎 쓰고 철창을 넘어 자전거 도로로 진입했다. 내가 진입하는 길을 못 봤던 건지 알 수는 없다. 혹시나 북로로 여정을 잡을 예정이라면 청윤교를 건넌 시점에서 길을 유심히 살펴야 한다. 철조망 넘어 한참을 걸어도 연결되는 길이 나오지 않았으니 그 시점에서 무슨 갈림길이 있지 않았나 싶다.

어쨌든 한산하니 강 하나 건너 길인데도 아라뱃길 남로와는 뭔지 모르게 다른 느낌이다. 특히나 관리가 전혀 안 된 듯하다는 게 가장 큰 차이점. 도로 중간이 땅 속에서 무슨 괴물이 뛰쳐나왔나 싶게 솟아올라 보도블록이 다 헤집어진 곳도 있었으니, ‘아니 관리를 대체 어떻게 하는 거야.’라며 욕을 하던 찰나 ‘공사 중 진입금지’라고 쓰인 줄이 앞을 가로막는다.

아라뱃길 북로는 공사 여부를 확인

잠시 고민했다. 나는 되돌아갈 수 있나. 그사이 걸어온 5킬로미터 정도의 거리를 더 걷고 울타리를 넘어서. 답은 간단했다. ‘NO’ 맘속으로 ‘죄송합니다.’를 되뇌며 줄을 들어 올리고 그 공사 구간을 지나쳤다. 조금 더 걷다 쉼터가 나와 바람막이 점퍼를 벗어 가방에 넣고 물 한 모금 마시며 전열을 정비했다. 아 이제 본격적으로 즐겁게 걷자 생각하고 가벼이 발걸음을 옮기는데 1킬로미터마다 공사 구간이 나타났다. ‘공사 중진 입 금지’ 문구는 더 많이 그리고 진입을 막는 장비는 더 견고해졌다. 그때마다 나 자신에게 되물었다. ‘돌아갈 수 있나?’ 그때마다 나의 대답도 같았다 ‘NO!’ 그리고 그래서 전진. 세 번 정도 공사 구간을 지났을 때 아 혹시 길이 끊긴 거 아닌가 하는 조바심마저 들 때, 저 멀리 뛰어오는 분이 보인다. ‘아 길이 있구나’ 하는 안도감에 그동안 걸은 피로는 생각도 나지 않는다.

하지만 모든 불행은 행복할 때 오는 법. 이번 공사 구간은 정말이지 더는 너를 지나가게 할 수 없다는 굳은 결의가 보인다. 아래로도 중간으로도 도저히 파고들 틈이 보이지 않았고 위로 넘어가기엔 높이도 만만찮고 게다가 다리 위라 자칫하면 강릉행이 아닌 강물행으로 끝날 듯했다. 정말 말 그대로 오도 가도 못하고 있을 때 저 멀리 산책 나오신 듯한 분이 보였다. 저 여잔 뭐지. 하고 약간 경계하고 계신 듯할 때, ‘되돌아갈 수 있나’ ‘NO’를 백만 번쯤 반복하던 나는 큰 소리로 도와주십사 했다. 본인이 잡아 줄 테니 넘어오라셨고, 정말 되돌아갈 수는 없다는 일념에 그 처음 보는 분의 손을 덥석 잡고는 힘겹게 넘어갔다. 감사 인사와 함께 어디로 가시냐 물으니, 본인도 저쪽에 한 번 가보려고 하신다고, 말려야 하나 생각도 했지만 뭐 다 본인의 선택인 것! 어찌 들어오셨는지 모르게 뛰고 계신 분도 있었잖는가. 감사하다는 인사를 백만 번쯤 하고 다시 내 갈 길을 갔다.

북로로 진입해 사람도 자전거도 보이지 않아 너무 좋다 했는데, 사람도 자전거도 없는 데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시천교를 지나니 그래도 끊기는 길도 없고 아라폭포도 보이고 커다란 ‘황어’ 조형물이니 ‘수향원’이라는 전통 가옥식의 공원도 보인다. 오가는 자전거와 운동하는 사람들, 산책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늘 아래 앉아 가만가만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보인다. 왠지 남로보다는 더 한가로운 느낌이다. 좋구나.

아라뱃길 북로의 풍경

김포 여객선터미널 근방에 접어들었을 때는 이미 17킬로를 넘어선 지점이고, 없는 길 넘고 헤매다 보니 더 지친 느낌이다. 어느 건물 앞 벤치에 앉아 신발끈을 풀고 발을 풀어준다. 생각해보면 부산 여정 때도 이쯤 발과 발목에 무리가 왔는데 첨이라 괜찮겠지 하는 생각과 지인과 같이 가다 보니 보조를 맞추다 더 무리를 했던 듯하다. 어쨌든 많이는 아닐지라도 나도 경험에서 배우는 게 하나는 있는 인간인지라 이번엔 다리와 발쪽 장비를 대대적으로 보완하기도 했고 중간중간 조금이라도 발에 신호가 온다 싶으면 앉아서 잠깐이라도 다리를 풀어주어 그때보단 상태가 양호한 듯했다.

이제는 한강이다.

이번에도 지난번 걸었던 남로가 아닌 북로로 걷기로 했으나 바로 북로로 들어서면 거리가 꽤 길어졌다. 그리고 부산길에서 강서 생태공원이 꽤나 좋았던 기억이 있어 강서 생태공원을 지나 양화대교를 건너 북로에 진입하기로 했다.

봄의 강서 생태공원은 움트는 생명의 기운들로 무척이나 시끄러웠는데 가을 초입의 공원은 지친 모습이다. 제법 더워진 날씨가 묵직해지는 발을 쉬려 벤치에 앉아 집에서 가져온 배를 먹으며 잠시 쉬다 보니 어느새 꼬박꼬박 졸고 있다. 기분 좋은 졸음이다. 그대로 벤치에 누워 모자를 얼굴에 덮어쓰고 낮잠을 잤다.

다디단 30여분의 낮잠을 끝내고 다시 길을 걸었다. 생태공원이 지나고 탁 트인 한강이 나타났다. 볼수록 장대한 강이다. 나라의 수도가 있을 법하다 싶다.

정오를 막 지난 시간이라 그늘 없는 한강길을 걷는 게 쉽지는 않다. 하지만 한강변에서 다양하게 한 때를 즐기는 여러 사람들의 모습, 낯익은 공항철도가 마곡철교를 가로진 모습, 가끔씩 튀어 오르는 이름 모를 물고기들을 구경하다 보니 저 멀리 양화대교가 보였다. 그리고 더 반가운 엘리베이터도 보였다. 아 정말 걷다 보면 문명의 이기를 사랑하게 된다. 기쁜 마음으로 엘리베이터 앞으로 다가갔는데 엇, 수리 중. 하. 잠시 맘을 추스르고 계단으로 올라간다. 가는 중 자전거를 어깨에 메고 내려오는 외국인이 보였다. 음 옆에 자전거 홈을 내놨는데 왜 굳이 메고 가시는 걸까? 짧은 영어로 나마 알려줘야 하나 하고 튀어나오는 오지라퍼를 잠재우고 그분 만의 훈련 방법일 수도 있겠다고 납득하며 계단을 올랐다. 대교에 올랐다. 높다. 확 트인 강변의 풍경이 시원하다. 그리고 무섭다. 그래 난 지독한 고소공포증이 있는 사람이다. 반쯤 좋아하며 반쯤 무서워하며 다리를 건넌다. 다리의 양 끝에 있는 건널목은 사용자 작동식이다. 괜스레 지나는 차들에 미안해진다. 가뜩이나 교통체증이 심한 서울인데... 기다려주는 운전자들이 예쁘다. 그리고 생각한다. 나도 다음에 이곳을 차로 지나갈 땐 이쁜 마음으로 그들을 보내주리라고. 음..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까? 북로 쪽 엘리베이터도 고장이다.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로 내려서자 난지섬이다. 잘 가꾸어진. 가본 적은 없지만 그 옛날 쓰레기 섬이었던 난지도의 얘기를 들었던 나는 잘 가꾸어진 난지도가 괜히 고맙다. 천대의 시선이 빛처럼 내려 꽂혔을 난지도는 이제 빛의 속도로 광클릭을 해도 예약이 힘든 곳이 되었다. 섬의 앞일은 아무도 모르는 법.

새로운 것은 힘이 난다. ‘새로운 것’ 자체가 주는 에너지가 있다. 북로에 들어서자 그 힘으로 다시 즐겁게 걷기 시작한다. 그리고 공원 편의점에서 생명수와 같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잔 마련했다. 마음은 라면을 끓이고 있었지만. 그때 먹을 걸! 사실 두 번째 날 저녁을 가볍게 먹고 한강 라면을 먹을 거란 계획이었는데, 스포 하자면 못 먹었다. 두 번째 라면 포인트였던 구리한강공원 편의점에선, 코로나로 ‘라면과 맥주’가 판매 중단이었다. 그나마 원래도 컵라면만 구비된 곳이었다. 하고 싶은 건 그때 하자! 이때 하지 못한 ‘라면과 맥주’는 진한 아쉬움으로 남아 내 맘 속에 ‘워런 버핏과의 식사’와도 같은 크기로 자리 잡았다. ‘한강’에서의 ‘라면’과 ‘맥주’를 위해 국토 종단을 국토 횡단을, 부산을, 정동진을, 또 한 번 걸을지도 모를 일이다.

다시 난지공원으로, 돌아오자.

그렇게 난지 한강공원에서 쓰지만 다디단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잔 마시고 다시 발걸음을 재촉한다. 세상 모든 일이 그렇겠지만 풍경과의 만남도 타이밍이 중요하다. 무슨 얘기냐면 그 담부턴 힘들어서 딱히 기억에 남는 게 없단 얘기다. 다만 여의도를 지날 때, 아 부산 갈 때 첫날 여의도까지 갔었는데, 아 그때는 한 걸음 더 걷기도 힘들었는데, 오늘은 이 정도면 정말 잘했구나 ‘나 자신아!’ 했다. 그리고 사진으로 남긴 국회의사당의 모습이 지난번보다 약간 더 좋다. 가까이 있는 것보단 조금 거리를 두고 보는 게 때론 더 좋을 수도 있겠다 싶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처럼. 그래 너, 소중한 내 사람아, 너와 나 사이에 한강과 같은 푸르르고 시원한 거리를 두자.

정확한 목적지를 정하진 않는다. 왜냐면 걸어봐야 안다는 걸 부산까지 걸어서 겨우 알았으니까, 첫날의 잠정적 목표점을 용산쯤으로 잡고 그 근방에 숙소를 잡았는데, 거봐 역시나 못 갔다. 광흥창역? 정동진을 가지 않았다면 와 볼 일이 없었을 듯한 동네와 지하철역을 끝으로 첫날의 걸음을 마쳤다. 휴대전화도 그만 쉬기로 한 듯. 정확하게 전원이 나가 버린다.


부록 – 먹고 마시는 이야기 1편 ‘차선의 선택, 그 의외의 즐거움’


집에서 준비해 온 배 한 개와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으로 종일 걸었다.

사실 부산에 걸어갈 땐 다이어트 목적도 슬쩍 있었기에 계란, 커피 정도 먹고 저녁식사만 하고 평균 30~40킬로미터를 걸었었다. 미쳤지. 그렇게 20일을 하고 나서 2.5킬로그램 정도 빠졌는데 나의 기대치는 25킬로그램 즈음이었기에 실망감이 무지 컸었다. 그래서 이번엔 다이어트는 아예 기대하지 말자고 생각했음에도, 혹시나 하는 맘 반, 그리고 격려_노는 데 왜 격려해 주는지는 알 수는 없지만_의 술자리가 기다리고 있었기에 먹는 걸 좀 자제했다.

그리고 용산 인근의 나의 원티드 술집 목록_평소 가보고 싶은 술집 혹은 식당을 네이버 지도 앱에 표시해 뒀다가 기회가 있을 때 방문한다_중에 가장 가고 싶은 곳으로 정하고 약속 장소를 통보했다. 당신은 카드를 가져오라, 나는 장소를 정할 터이니.

이촌동 시장 안쪽으로 들어서니 오 마이 갓! 골목 자체가 정말이지 갓벽한 나의 술집 아우라를 풍기는 곳이었다. 좁은 골목과 꽉 들어찬 오래된 노포들. 이둘로 벌써 소주 2병쯤은 원샷할 수 있는 조합의 분위기 완성이다. 목적했던 식당은 역시나 외양부터 나의 취향 저격이었다. 그런데, 아, 빈자리가 없다. 아직 6시도 안됐는데, 퇴근 시간도 안 지났단 말이야! 게다가 이미 테이블마다 빈 소주병 2~3개는 기본이다. 아 그럼 혹시나 이미 오늘의 술을 끝내신 분들이 있진 않을까? 하는 기대로 주방 쪽으로 가서 전혀 나에게 관심 없는 직원 혹은 사장님께 여쭸다. 혹시 대기하면 얼마나 걸릴까요라고. 역시나 관심 없는 듯한 말투로 ‘한 시간쯤요’라는 대답. 안돼. 20분 정도면 모르겠지만 난 지금 알코올과 맛난 안주를 나에게 제공해야 한다고오.

가고 싶었던 곳, 언젠간 가 볼 곳

포기하고 어디를 갈지 십분 정도를 우왕좌왕했다. 왜냐면 2안, 3안 따윈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원래 가지지 못한 것은 더 큰 법. 이젠 나의 선택은 어떤 경우에도 최선이 아닌 차선이 되어버렸기에. 그러다 선배가 ‘야 저기 가자’하고 노포 실비집 같은 비주얼을 가진 곳을 가리키고 얼결에 들어갔다. 닭갈비와 회라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안주의 조합들, 빼곡히 쓰인 메뉴판, 술집계의 김밥천국. 물론 푸드코트 같은 메뉴를 훌륭히 소화해내시는 훌륭하신 사장님들도 많으시지만, 멍하니 앉아계시다 0.5배속의 속도로 맞으시는 사장님을 보는 순간 아 아니구나 하는 느낌이 왔다. 기본으로 오이무침과 마른 멸치가 내어진다. 그래 또 몰라. 하고 나를 진정시킨 뒤 소맥을 들이켠다. 캬! 오이무침 집밥 맛이 슬쩍 난다. 괜찮다. 소주 반 병과 맥주 한 병을 비워 낼 즈음에야 주문한 닭꼬치가 나왔다. 아, 음, 어, 비주얼이 닭갈비를 꼬치에 꿰어놓은 듯했다. 그리고 맞았다. ‘닭갈비 꼬치’가 정확했다. 음 심지어 그리 맛있지 않은 닭갈비로 만든 꼬치. 아! 기대가 큰 만큼 실망이 큰 법. 여기로 나를 이끈 선배를_심지어 계산도 선배가 할 것임에도_인연을 끊고 싶은 기분이다.

오늘은 나름 국토횡단의 역사적인(개인의) 첫날이란 말이야, 그리고 난 지금 40킬로미터를 걸어왔고, 또, 또 내 위장엔 지금은 흔적도 없을 듯하지만 배와 아메리카노 밖엔 다녀가지 않았다고. 아 정말 속상하구나. 빈속의 첫술이 얼마나 중요한 데에 에! 오늘은 망쳤구나!

선배도 별로였는지 처음 시킨 소맥 세트가 바닥을 보이자, 눈으로 야! 가자 한다. 밖으로 나오자 선배도 나의 ‘첫술’의 중요성을 알아챘는지 ‘뭐 먹고 싶냐, 다 사줄게’ 하신다. ‘아아, 하지만 나의 첫술은 이미 갔습니다’ 활활 타오르던 酒욕이 파사삭 사그라진다. 이러저러 이 가게 저 가게 기웃기웃 망설망설 하는 사이에 숙소가 있는 용산역 근처까지 왔다.

아 오늘은 그냥 여기서 헤어지고 혼자 맥주나 사들고 가야겠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야 저기 가볼까? 하는 선배의 목소리. 선배가 가리킨 곳엔 엄청난 포스를 뿜지는 않지만 맛집탐방러가 아닌 동네 사람들이 찾을 것만 같은 연탄불고기 집의 간판이 연탄불처럼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가게로 들어섰다. 이미 8시 저녁 타임은 끝난 시간인데도 테이블은 만석이다. 주변 테이블을 기웃해보니 모두 연탄불고기를 기본으로 깔고 있는 듯하다. 연탄불고기와 고추장 불고기가 있다. 무슨 차이인지 모르겠다. 다음에 먹어보고 알 일이다. 연탄불고기 2인분과 계란찜 그리고 ‘카스처럼’을 시켰다.

기본찬이 먼저 세팅된다. 음, 기본에 충실하다. 애피타이저 안주로 충분하다. 그렇게 잔을 말고 있으니 밖에 있는 연탄불에서 불향 입힌 불고기를 주방으로 가져가 프라이팬에 담고 그 위에 파채를 가득 얹어 부르스타 위에 올려주신다. 불향이 기분 좋게 퍼진다. 아! 성공이구나! 불향과 맛있는 양념, 좋은 육질의 삼박자가 적당하다. 여기 소주 한 병 더요!. 잠시 후 계란찜이 나온다. 보이는 모양이 계란찜이라기보다 연두부를 연상시킨다. 맛 또한 그러하다. 극강의 부드러움이다. 연두부를 섞은 것일까? 소주를 가져다 주신 이모님께 여쭤보니 아니라 신다. 이 가게 만의 노하우가 있으시다고. 선배는 계란 맛이 진하게 나지 않아 별로라 신다. 호불호가 갈리는 모양. 나는 부들부들한 그 식감. 호요! 완전 호요!! 그 뒤로도 소주를 두어 병쯤 추가한 듯하다.

기억은 희미해졌고. 살아 돌아오면 또 술 사주겠단 선배의 외침과 내가 가진 예의를 몽땅 끌어올린 감사의 인사와 바이 바이로 첫날의 먹고 마심을 끝낸다. 기대하지 않음과 실패와 실패에 따른 실망감이 차선의 선택을 최선보다 더 높은 만족감의 자리로 끌어올린다. 최선이라 생각했던 것에 실패한 당신, 기대하시라 더 달콤한 차선이 기다리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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