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동짓날 팥을 쑤게 될 줄이야
뭐든 다 ‘때’가 있다는 말이 참 시시했다.
공부할 때, 화장할 때, 결혼할 때, 여행할 때, 그런 머리 그런 옷으로 치장할 때.. 한때는 그걸 시도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변명이라 여겼다. 물론 여전히 어떤 일들은 시기보다 의지가 더 중요하다 생각하지만, 30대 초반까지도 즐겨 입던 짧은 치마에 먼지가 쌓여가는 걸 보면 과거에 비해 ‘때가 있다’는 말에 상당 부분 동의하게 된 듯하다.
그러고 보면 제철음식을 찾아먹거나 무슨 날엔 뭘 먹는다는 풍속을 예전에 비해 착실히 챙기는 것도 일종의 ‘때’를 지키려는 변화인 걸까. 12월에 들어서자마자 여태 의식조차 해본 적 없던 동짓날을 기다리며 팥죽 만드는 법을 공부했다.
팥은 다른 콩과 달리 불리지 않고 삶아야 본연의 묘한 자줏빛을 지킬 수 있다. 팥을 깨끗이 씻은 후 바글바글 5분쯤 끓이는데 처음 삶은 물은 배탈을 일으키는 성분이 있으니 버린다. 아이가 있으니 솥 앞을 지키기 힘들다는 핑계로 전기밥솥에 팥을 쏟아 넣고 물을 팥 양의 3배가량 부어준 뒤 잡곡 모드로 가동- 이내 집안은 팥 향기로 가득 찬다. 40여분 후 요란하게 김 빠지는 소리에 조금은 불안한 마음으로 솥을 여는데, 통통하게 퍼진 팥들이 서로 엉켜 붙어 제법 팥소 모양새를 띄고 있다. 정석인 새알 대신 콩밥 지어놓은 것을 팥에 섞어 적당한 물과 함께 믹서기에 갈아낸다. 이를 널찍한 팬에 붓고 진득해지게 저어주면 드디어 노력과 잔꾀가 뒤섞인 팥소가 완성된다.
조금 되직하게 팥죽을 만들어 내어 주니, 태어나 처음 팥을 먹어본 아이는 그 맛에 고개를 갸웃거리다 이내 입술을 팥빛으로 물들이며 먹는다. 그 모습을 보니 ‘때’라는 것은 사실 내가 그것을 하기 원할 때가 가장 적절한 때라는 생각이 스친다. 누가 나에게 동지이니 팥죽을 쑤라고 강요했다면 이른 아침잠을 포기하고 서성이는 시간이 즐거웠을 리 없으니까.
[이든 밥상]
팥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