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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 eden Feb 19. 2021

요령껏 만들어 쟁여두는 라구소스

힘들 땐 이 소스를 초콜릿처럼 꺼내먹어요

나는 태권도 3단이다.

어린 시절 꽤 오래 태권도를 하며 몇 명의 관장님을 거쳤는데 그중 한 관장님이 기억에 남아있다. 말랐지만 다부진 몸에 각지고 단단해 보이는 턱을 가졌던 그는 품세 연습이 시작되면 한 손엔 죽도를 들고 먹이를 찾는 하이에나처럼 도장을 거닐며 우리를 노려봤다. 그러다가 품세 순서가 틀리거나 동작이 어설프면 소리도 없이 다가와 손에 든 죽도로 머리를 가격했다. 따악- 죽도 소리가 도장에 울려 퍼지면 우리 모두는 초긴장 상태에 돌입했다. 머리를 사수하기 위해 눈치껏 옆사람을 따라 하다가는 그걸 또 귀신같이 알아챈 관장님의 죽도와 밀접한 만남을 가지게 될 뿐이었다. 심지어 어떤 친구는 너무 긴장한 나머지 동작을 하얗게 잊고 그 자리에서 실수를 하고 말았다. 그야말로 오줌 지리게 무시무시한 관장님이었다. 그에겐 어떤 요령도 통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진즉에 품세를 완벽히 익혀 머리를 지켜내는 방법을 택했다. 그렇게 태권도 3단이 됐다.


수영은 내 몸 하나 건사할 정도는 한다.

초등학교 때 물에 두려움이 있어서 수영을 배웠는데, 처음 수영을 가르쳐준 강사는 눈매가 날카롭고 노란 염색머리를 한 사람이었다. 그의 등엔 마치 문신처럼 늘 십여 개의 보라색 부황자국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게 뭔지 몰랐던 어린 나에겐 무척이나 기괴해 보였다. 수영장을 돌다가 숨이 차서 잠시 바닥에 발을 딛을라치면 강사의 호루라기 소리가 들렸다. 삐삑- 꾀부리지 말라고 다그치기 위해 물살을 가르며 다가오는 그의 등에서 부황자국들이 꿈틀댔다.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지만 나는 그 보라색 동그라미들이 무서워 도망치듯 물속으로 돌아가 음파를 해댔다. 그렇게 수영을 배웠다.


나는 체육교육학을 전공했다.

운동을 좋아했고 잘하기도 했기 때문에 체육교육학과 진학을 목표로 했다. 목표가 정해진 후엔 체대 입시학원을 다니며 그저 묵묵히 매일 주어진 운동량을 채워냈다. 훈련이 힘들 땐 뺑끼 좀 부리자며(이때 처음 ‘뺑끼친다’는 말을 알았다) 옆에서 꼬드겨도 절대 휩쓸리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요령 없이 운동을 배운 탓인지 확실한 목표가 있었던 탓인지, 너무 힘들어서 눈에선 눈물이 나고 입에선 쌍욕이 나올지언정 소위 뺑끼를 스스로 허락할 수 없었다. 나에게 융통성이 없다고 말하던 학원 동기생들이 입시에서 떨어져 재수를 확정한 사이, 나는 원하던 대학에 무리 없이 합격했다.


이후 사회생활을 하고 지금껏 살면서 어떨 땐 ‘요령껏’하는 게 현명하다는 걸 알았지만, 어쩐지 늘 내 마음은 ‘요령 피우는 것’에 부정적이었다. 그 인식은 육아에도 적용됐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힘이 들어 대충 하고 싶어 지다가도 마음부터 불편해져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육퇴 후 쉬고 싶은 마음을 고이고이 접어두고 만든 음식을 아이가 잘 먹지 않자 단전에서부터 화가 끓어올랐다. 내가 이걸 얼마나 열심히 만들었는데.. 이러다간 어느 순간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따위의 말을 하게 될 것만 같았다. 나도 아이도 행복하지 않은 최선에 왜 온 힘을 쏟고 있는 건가 싶어 정신이 들었다.

‘힘 좀 빼고 요령껏 하자, 그런다고 큰 일 안 난다.’


그렇게 가끔은 죄책감을 내려놓고 요령을 피워본다. 아이에게 책 대신 휴대폰을 보여주기도 하고, 빵이나 과자로 간식을 때우거나 목욕을 건너뛰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날을 위해 만들어 쟁여둔 라구소스를 꺼낸다.




약간의 기름을 두른 팬에 다진 양파가 갈색으로 변할 때까지 캬라멜라이징한 뒤 덜어둔다. 팬에 다진 소고기, 당근, 양송이, 샐러리 순으로 넣고 달달 볶다가 덜어둔 양파와 껍질을 벗겨 데친 토마토를 추가해 골고루 섞는다. 적당히 어우러진 소스에 월계수잎과 육수를 넣어 뭉근하게 오래도록 끓인다.



이 과정에서 요령을 좀 피우자면,

덩어리 고기 대신 다진 고기 사용

토마토로 끓여 소스를 만드는 대신 찹토마토나 홀토마토 구매해서 조리

월계수잎이 없을 때는 미련 없이 패스


대신 채소는 다지기를 사용하는 것보다 직접 써는 것이 물도 덜 생기고 끓인 후 너무 뭉개지지 않아 식감이 살아있기 때문에 가능하면 칼로 다진다.

이게 무슨 요령인가 싶을 수 있지만 이렇게 한번 만들어서 소분해 냉동해두면 파스타나 리조또는 물론이고, 얇게 썬 감자 위에 라구소스를 올려 구워낸 감자피자, 우유와 치즈, 떡을 넣고 끓여낸 로제떡볶이, 가지 위에 소스를 올려 쪄낸 가지 라구찜 등으로 무한 활용할 수 있다.


라구소스로 만든 파스타와 감자피자
초점 나간 로제떡볶이


사활을 걸고 익혔던 품세는 가물가물 해도 친구들과 태권도장에서 닭싸움하며 놀던 건 선명하고, 수영은 할 줄 알지만 여전히 물을 썩 좋아하지 않는다. 대학 입시하며 느슨해지지 않은 것은 잘한 일이라 생각하지만 손꼽히게 힘들고 외로웠던 시기로 기억된다. 돌이켜보면 최선이 내 인생에 무조건적으로 많은 걸 남겨놓은 건 아니었다.


그러니 육아 같은 장기전이라면, 사실 꼭 육아가 아니더라도, 최선과 요령 사이 적당히 타협할 줄 아는 용기가 필요한 것 같다. 그 용기를 낸 후 내가 깨달은 것은 부모의 노력으로 아이가 잘 자라날 순 있지만, 부모의 행복을 갉아먹으며 아이가 행복하게 자라날 순 없다는 거다. 약간의 요령이 소소하게나마 행복을 확보해준다면, 망설이지 말고 요령을 피우자.

사실 이것은 어쩌면 게을러지고픈 나를 위한 핑계이자 주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럼 또 뭐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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