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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 eden Mar 01. 2021

이 시국에 여행을 갔다,새우카레를해놓고

사회적 거리두기와 더불어 꼭 필요한 거리두기

“나 여행 좀 다녀올게.”


아이가 잠들고 남편과 둘만 남은 시간, 고심 끝에 결심한 말을 꺼냈다.

아이는 정말 변화무쌍한 존재라 어떤 때엔 말도 잘 따라주고 수월하게 굴다가도, 어제 그 애가 맞나 싶게 돌변해 떼를 쓰고 힘들게 한다. 그런데 요 며칠 후자 케이스를 겪게 된 데다, 집안일이며 아이 반찬 만드는 일 등의 잔업과 개인적인 업무가 겹쳐 에너지가 바닥을 드러냈다. 나 자신에게만 집중해 충전하고 싶어도 아이가 눈에 보이면 온 에너지가 또 아이에게 쏟아지니.. 게다가 요즘 ‘엄마 껌딱지 모드’라 뭐든 엄마가 해줘야만 한다고 요구를 하는 것이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망설여지긴 했지만 체력도 멘탈도 탈탈 털려 고갈된 채로는 아이에게도 남편에게도 제대로 된 노릇을 할 수 없었기에 나를 채워낼 방법을 고민하다 여행 이야기를 꺼낸 것이었다.


“다녀와. 안 그래도 그러라고 하고 싶었어.”

한결같고 안정적인 성품의 남자가 기복 심한 여자를 만난 지 16년 차- 이젠 스쳐 지나는 표정, 짧은 한숨에도 마음을 읽는 능력이 생긴 모양이다.

남편이 기꺼이 등을 떠밀어줬음에도 정말 둘만 남겨둬도 될지를 고민하며 또 며칠을 망설였다. 이러다간 결국 주저앉을 것 같아서 친한 언니에게 앞뒤 설명도 없이 메시지를 남겼다.

‘언니. 여행 갈래요?’ ‘그래, 가자!’

그렇게 성사된 여행의 키워드는 ‘조개구이와 미술관’이었는데, (언니는 이것이 무슨 술집 이름이냐고 했다) 조개구이 흡입과 미술관 관람을 여행의 최우선 목적으로 한다는 뜻이었다.


출산 이후 생활은 임신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임신했을 땐 몸이 좀 무거웠을 뿐, 원하는 일을 하는 것에 큰 제약을 느끼지 않았는데 아이를 낳고 보니 지극히 평범한 일도 쉽사리 할 수 없는 일로 변했다.

내가 자고 싶은 시간에 자고 눈 뜨고 싶은 시간에 일어나는 건 당연스레 포기해야 했고, 아이를 오래 혼자 둘 수 없으니 여유 있게 볼 일을 볼 수도 없으며, 생체 알람이 있는지 딱 30분씩만 칼같이 자고 일어나는 아이의 낮잠시간에 제대로 밥을 챙겨 먹기란 버거웠다. 외식도 힘들었는데 특히 고기나 조개 등 굽는 형태의 음식을 밖에서 먹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조개구이를 꼭 한 번은 먹고서야 겨울을 지났는데 이번엔 놓치고 지날 상황이었다. 예술에 조예는 없지만 남편과 전시회나 공연을 보고 의미를 찾는 무의미한 수다 떠는 걸 즐겼는데 이 역시 못한 지 오래였다. 이번 여행 키워드가 ‘조개구이와 미술관’된 이유였다.


이쯤 되면 설렐 법도 한데 여전히 걱정스러운 마음이 앞섰다. 재우고 놀아주고 씻기고 거의 모든 것을 척척 해내는 남편이지만, 아이 음식을 준비하고 차리는 건 오직 나의 영역이었다. 아이가 맛있게 먹고 남편이 차리기 쉬운 음식을 준비해둬야 했다.

일단 아침은 늘 먹는 오트밀 죽을, 점심은 쟁여둔 라구소스로 덮밥을 해주면 될 듯한데, 저녁 한 끼가 더 필요했다. 엄마들이 남편 떼놓고 계모임 여행 갈 때 한솥 끓여놓는다던 곰국을 준비할까 하다가 가능하면 불을 쓰지 않고 뒤처리도 조금 더 수월한 음식이 없을까 고민했다.

‘전자레인지에 데워서 밥에 얹어줄 수 있는.. 카레! 라구소스에 고기가 들어가니까 가능하면 해산물로.. 새우카레가 좋겠네.’

그렇게 아빠가 차릴 아이의 삼시세끼가 정해졌다.




기름을 살짝 두르고 감자와 당근을 달달 볶다가 어느 정도 익으면 양파를 넣어 함께 조금 더 볶는다. 냄비가 약간 눌어붙기 시작하면 물을 자박하게 붓고 카레가루를 솔솔 털어 넣은 후 잘 풀어 뭉근하게 끓여준다. 새우살을 마지막에 넣고 조금 더 끓여낸다. 끝으로 약간의 우유나 치즈를 넣으면 아이도 부담 없이 먹는 부드러운 카레가 완성된다.


아빠가 차린 새우카레밥, 느타리버섯볶음
여행 다녀온 뒤 새우카레를 반찬처럼 따로 줘보았다.




남편과 아이가 생각보다 훨씬 더 잘 지내준 덕에 마스크와 사회적 거리두기를 지키며 여행을 잘 마치고 돌아왔다. 이런 때에 여행을 갔으면 조용히 다녀오고 말 것이지 뭘 떠드나 싶을 수도 있겠다. 자랑하려는 의도라기엔 인스타스러운 갬성 사진 한 장 없다. 다만 누군가 지금 아이를 보며 지치고 힘들고 설사 후회되는 감정이 들어 다 놓고 잠시 떠나버리고 싶대도 그럴 수 있다고, 잘못된 게 아니라고 이 글로 말해주고 싶었다. 더해, 각자의 상황과 방식은 다를 수 있지만 오직 자신만을 위한 휴식을 꼭 가질 수 있길 바라며.


너무나 당연해 보였던 것들이 말할 수 없이 소중하다는 것을 배운 지난 일 년처럼, 육아에서도 당연함의 소중함을 깨닫기 위해서는 종종 거리두기가 필요하다는 걸 이번 여행이 알게 했다. 하루치 여행에서 얻은 힘은 앞으로의 수많은 날들에 나를 지탱할 것이다.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에 이런 대사가 있다.

“You make me wanna be a better man.”

이 영화를 처음 볼 당시엔 이런 말을 듣는 여자가 참 부러웠는데, 지금은 이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진정 행복하다는 걸 알겠다. 이 말을 그에게 돌려주고 싶다.

“당신은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게 만들어요.”

+ 글을 발행하고 보니 언니가 이 글을 본다면 서운하다고 쌍욕을 할 것 같아 발길을 돌렸다. 일 년에 손에 꼽히게 연락하는데도 늘 편하고, 갑작스러운 여행을 두말없이 함께해준 언니에겐 영화 제목을 빌어 마음을 전하고 싶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 여행  엄마 대신 아빠가 차린 아이 점심


# 사라져야 할 독박 육아, 육아는 함께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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