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용빨간맛,아이용하얀맛을한 번에
“지 아빠만 쏙 빼닮았다이.”
신생아실 창 너머로 아이를 처음 마주한 할머니가 말했다. 툭 하고 뱉어진 그 말에는 어쩐지 서운함이 배어있었다. 반면 시부모님은 아이가 남편 애기 때를 많이 닮았다며 좋아하셨다. 어르신들은 아이가 외탁이냐 친탁이냐를 두고 우리 쪽을 닮았으면 왠지 기분 좋고 상대 쪽을 닮았으면 괜히 서운하다더니, 아직 조글조글한 신생아 앞에서 그런 마음이 든 걸까.
남편의 아몬드마냥 동글길쭉한 외까풀 눈매를 빼다 박아서인지 겉으로 보기에 아이는 확실히 남편을 많이 닮아있었다. 그런데 나는 그 점이 1도, 아니 0.0001도 서운하지 않았다. 아이가 뱃속에 있을 때부터 외모도 성격도 사람이나 삶에 대한 태도도, 그냥 모든 걸 다 남편을 닮아 태어나길 바랬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나는 아이가 ‘나 같지 않기를’ 바랬다.
남과 나를 비교하는 것으로 내 실력, 행복의 레벨을 가늠하고 속 끓이지 않기를.
싫은 내색을 감추지 못해 남에게 상처를 주거나 미움받는 게 익숙한 사람이 되지 않기를.
창의적이고 자유로운 것을 갈망할 뿐, 정작 고정화된 사고와 태도를 끌어안고 있지 않기를.
생각의 추진력을 따라잡지 못한 채 주저앉아있지 않기를.
타인에게 쉽게 상처 받고 흔들리지 않기를.
약해 보이지 않으려고 너무 애쓰지 않기를.
이런 간절한 바람을 가졌다니 내가 나를 지독하게 싫어하느냐면 그건 아니다. 나는 오히려 이런 나를 애틋하게 아낀다. 다만 아이가 나보다는 아주 조금이라도 더 나은, 더 편한 삶을 살았으면 하는 마음이 드는 것뿐이다. 하지만 DNA로 찾아낸 운명이라는 BTS 가사처럼 내속에서 나온 내 새끼가 나를 전혀 안 닮았을 리 없다.
놀다가 제맘대로 되지 않아 성질을 부리면 아무리 회피해보려 해도 부루퉁한 그 모습이 딱 ‘나’다. 의자에 앉아 한 다리를 접어 올리고 밥 먹는 모습이 뭐 저런 것까지 닮나 싶게 ‘나’다. 음식 취향도 닮는가 보다.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중 좋아하는 순위를 매기라면 나는 첫 번째가 닭고기다. 닭볶음탕, 닭갈비, 치킨, 닭똥집, 닭발, 닭염통, 삼계탕, 닭개장, 닭꼬치, 전기구이통닭, 탄두리치킨, 치킨브리또, 오야꼬동, 세세리, 타다끼.. 조리 방법별로, 부위별로, 아는 맛은 아는 맛대로, 변주된 것은 또 그런대로 맛있으니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갑자기 분위기 닭예찬)
이토록 닭을 사랑하는 내가 어느 날 아이 반찬으로 닭다리 구이를 내줬다가 처음 보는 닭다리를 작은 손에 꼭 쥔 채 야무지게 뜯는 모습을 보고 깨달았다.
‘아 저것은 나다..! 저것은 내 아들이다..!’
나를 닮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뒤에 '내 식성을 닮아 닭을 좋아하는군!’하는 묘한 기쁨이 숨겨져 있던 걸 보니 할머니의 서운함과 시부모님의 기쁜 감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이가 남편을 닮아 서운해하던 할머니는 어린 시절 내가 아빠를 똑닮아 예뻐했다. 어디 가서 헤어져도 아빠가 누군지 곧장 찾을 수 있겠단 얘길 들을 만큼 외모도 성격도 아빠를 많이 닮았었다. 자라면서는 아빠를 닮아서 좋고 싫음이 생겼다. 예를 들면 아빠의 얇은 다리를 닮은 건 좋았지만 그의 굵은 인상보다는 엄마의 여성스럽고 생글한 얼굴을 닮았다면 좋았을 걸 생각했다. 사실 얼굴 자체보단 생글함으로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는 것이 좋아 보였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나이가 들면서는 웃는 모습이 엄마를 많이 닮았단 말을 듣기 시작했다. 당연한 결론이지만 나라는 존재는 두 사람의 장단점이 요래조래 적당히 섞일 수밖에 없는 것이니, 뭘 닮아 좋고 싫고 하는 생각은 그만하기로 했다. 기본 재료를 받았으면 어떤 양념을 해서 어떤 음식으로 완성시킬지는 내 몫인 것을.
그러니 아이가 나를 닮았다는 것이 쓰라릴 순간이 올까, 거울처럼 꼭 같은 모습을 보며 웃게 될까 울게 될까, 아이에게 나를 닮았단 말이 기분 좋은 의미려면 좋으련만, 하는 마음의 짐들도 내려놓아야겠다. 날 전혀 안 닮을 수도 없거니와 설사 그토록 거부하던 나의 단점을 닮았더라도 그걸 바꾸고, 안팎으로 가꾸고, 어떤 사람이 될지 정하는 건 제 몫일 테니.
같은 재료, 다른 양념으로 동시에 하는
어른용 & 아이용 순살 닭볶음탕
[동일 재료]
닭다리 순살 700g (어른600g/아이100g), 양파, 감자, 양배추 (당근, 파, 고추 등 추가 가능)
[어른용 빨간맛]
닭은 깨끗하게 씻어서 냄비에 차곡히 깔아준다. 여기에 고추장과 고춧가루를 듬뿍 한 스푼씩 넣는데 떡볶이나 닭갈비 느낌으로 눅진한 빨간맛을 원할 때는 이 비율로 하고, 깔끔한 빨간맛이 땡기는 날은 고추장을 덜 쓴다. 다진 마늘 한 스푼, 설탕 한 스푼, 진간장 한 스푼을 넣고 닭과 양념이 잠길 정도로 자박하게 물을 붓고 끓인다.
조리 전에 닭을 한번 우르르 삶는다든지, 닭과 양념을 한 데 섞어 몇 시간 재운 후 끓인다든지 그렇게 하기도 하지만 재빨리 간단히 할 땐 순서고 뭐고 없이 저렇게 다 때려 넣고 끓여버리는데 그래도 맛있다. 게다가 뼈 없는 순살은 데쳐낼 필요가 없는 듯하다.
센 불에 끓어오르면 중불로 낮추고 채소들을 넣고 냄비 뚜껑을 닫아 20분 정도 끓여준다. 다 익었으면 약불로 낮추고 후추 톡톡톡톡, 물엿이나 올리고당 한 바퀴 휙 둘러 저어준 뒤 불을 끈다. 요즘 금값이라는 파를 추가해도 좋다. (파테크를 하든가 해야지)
[아이용 하얀맛]
닭다리살 한 조각에 염도가 조금 낮은 아이용 진간장 반 스푼, 새우가루 반 스푼을 넣고 물을 자박히 부어 센 불로 끓인다. 끓어오르면 중불로 낮추고 채소 넣어 푹 끓이는 과정은 동일. 마무리로 약불에서 올리고당이나 매실액으로 단맛을 추가해주고, 불 끄고 참기름 한두 방울 떨궈준다.
어른용이든 아이용이든 처음부터 물을 많이 넣고 끓이기보단 졸아들면 물 추가하기를 반복하면서 끓이면 고기에 맛이 더 잘 배는 듯하다.
상에 내놓기 전에 두 가지 닭볶음탕 맛을 보니, 그 맛이 전혀 다르다 하기엔 어딘가 닮아있고, 똑같다 하기엔 묘하게 다르다. 부모와 자식마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