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호
[눈사람 자살 사건]
그날 눈사람은 텅 빈 욕조에 누워 있었다. 뜨거운 물을 틀기 전에 그는 더 살아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더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자살의 이유가 될 수는 없었으며 죽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사는 이유 또한 될 수 없었다.... 나는 따뜻한 물에 녹고 싶다. 오랫동안 너무 춥게만 살지 않았는가.
[천국의 겨울]
얼음 속에 온갖 꽃들이 피어 있었다. 시들지 않는 꽃들이었다.
얼음 속에 나비들이 앉아 있었다. 모두 움직이지 않는 나비였다.
얼음 속에서 창백하게 굳어버린 영혼들이 흐름을 멈춘 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음 속에서 일곱 개의 보름달이 굳어 있었다.
변할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늙을 수도 없었고 사라질 수도 없었다.
아무런 소리도 없었다.
고요했다.
"여기가 천국의 겨울입니다. 영원한 겨울이지요." 천국의 안내인이 영혼들에게 말했다.
"영원한 평화군요." 안개더미처럼 불투명한 한 영혼이 중얼거렸다.
"그렇습니다. 이곳엔 고통도 없고 싸움도 없으며 슬픔도 기쁨도 없습니다."
[고슴도치 두 마리]
고슴도치 두 마리가 가시를 상대방의 몸에 찌른 채 피투성이가 되어 함께 죽어 있었다. 그들은 서로 너무 사랑했던 모양이다.
[구덩이]
... 그러나 그 어디에도 구덩이를 빠져나와 죽은 사람의 뼈는 보이지 않았다. 모두들 구덩이를 파다가 구덩이 안에 제 뼈를 파묻고 죽어간 것이다.
[가면을 쓴 늙은이]
그의 얼굴은 가면뿐이다. 가면을 벗겨도 가면 뒤에 또 가면이 있고, 그 가면 뒤에 또 가면이 있다. 양파껍질 같은 가면, 얼굴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