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25.7-2

by 하린

죽는 방법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소심한 시도를 했던 경험이 있고 그때 확신했다. 아 이렇게 죽으면 되겠구나. 그럼에도 죽는 일이 어려운 까닭 중 하나는 민폐를 끼치지 않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최근에 방법을 찾았다. 나에게 부당한 일을 한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면 되었다. 공평하지 않은가. 월세를 무리하게 올려 받으려는 집주인의 소유지는 민폐를 끼칠 적당한 장소였다. 그래서 실행을 했고 성공을 했다. 그녀는 월세를 꼬박꼬박 제때 내며 다른 세입자들과는 달리 아무런 문제도 일으키지 않고 거주하던 나에게 4년이면 오래 살았다며 월세를 20%나 올려받으려다 내려받는 건 고사하고 집이 나갈 일 자체를 걱정해야 했다.

죽기 전 나는 나름의 준비를 했다. 집은 미니멀리즘의 표본처럼 싹 치우려다 그만 두기로 했다. 마지막은 이기적이고 싶었다. 대신 날선 편지를 적었다. 나의 소중한 40대를 앗아가고도 그건 나의 의무였으며 더 잘했어야 했다고 말했던 사람에게. 20대 중반부터 40대 중반까지 가스라이팅으로 나를 움켜쥐고 흔들며 내 자존감을 땅 밑 깊숙한 곳으로 내리꽂았던 사람에게. 그리고 내가 가장 힘들었을 때, 아무도 나를 돌봐주지 않았을 때에도 나의 돌봄을 받았던 사람들에게. 당신들은 잘못이 없다. 내가 나서서 한 일이다. 라고 적지 않았다. 그들은 나의 거친 상황을 모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눈을 감은 채 나를 써먹었고 이득을 얻었다. 나는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주려 노력했지만 정작 내가 해결해야만 하는 나의 문제들은 제자리에 고여서 썩어가고 있었다. 그것들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나의 삶을 마치 음식물 쓰레기처럼 뒤덮은 채 아무리 헤쳐도 온몸에 달라붙어 떨어지기는 커녕 점점 더 맨살을 깊고 깊게 파먹어 들어가고 있었다. 잔혹한 세상에서 한 몸이라도 건사하기 위해 배워야 할 것들을 익힐 시간은 나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도 나를 경제활동인구로 원하지 않을 나이에 급작스럽게 내던져졌다. 철학자 하이데거가 말한 인간의 존재적 숙명인 피투성이라는 개념으로 말장난을 해보자면 나는 뒤늦게 진짜 현실 속으로 피투성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리 부딪치고 저리 부딪치며 그야말로 피투성이 되었다. 그 다음 수순은 자명했다. 세상이 나를 그렇게 몰아간다면 기꺼이 몰려 가주리라. 세상이 없는 곳으로.


죽음은 생각과 같지도 다르지도 않았다.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생각으로 답을 찾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까 말이다. 오직 경험으로만 알게 되든지 경험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모르게 되든지. 죽음은 철학의 대상이지만 사실상 삶을 고찰하기 위한 상반개념으로서의 의미 이상을 갖기는 어렵다. 그건 신비주의의 영역이다. 아니 그랬다. 막상 죽고보니 죽음 또한 실재의 한가지 모습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된다. 그저 내가 속한 세상이 예전의 그 세상이 아닐 뿐. 그래서 고요하다. 먹고 살기 위해 아귀다툼을 할 필요가 없다. 관계가 존재하지 않으니 갈등도 없다. 오직 나만이 오롯하다. 하지만 그 때문에 평온하다고도 아니라고도 말할 수가 없다. 그런 개념 자체가 없음은 저절로 안다. 몸으로 느낀다.


그래서 이제 마음에 드냐고? 드디어 벗어난 기분이 어떠냐고? 그건 모르겠다. 중요한 것도 아니다. 난 아직도 하고 싶은 말이 많다. 어쩌면 나는 정말로 죽은 게 아니라 일종의 결계 같은 곳에 잠시 놓여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모든 것을 다 털어버리고 내려놓을 기회가 주어지는. 운전 기사가 잠시 문을 열어놓고 화장실에 간 사이 멈춰있는 버스 안처럼. 흘러가다 잠시 세상과 철판 하나의 벽으로 격리된 채 정지된 공간과도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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